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추리닝’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부스스한 머리에 러닝셔츠를 입은 ‘옆집 아저씨’ 정도라 생각했다. 촌스럽고 격식 없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은 옷도 없나’ 하는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으니.
이제 멋을 아는 사람들이 대거 모인다는 패션 거리에 나가 행인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밝은 색상의 두건을 질끈 매고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갖춰 입은 멋쟁이들이라면 모두 트레이닝복 또는 트레이닝복 변형 아이템들을 입고 있다.
● 트레이닝복의 신분 상승
이제 트레이닝복은 ‘촌놈’에서 ‘멋쟁이’로 신분이 크게 상승했다. 이름도 스포티한 분위기를 가미해 ‘트레이닝 팬츠’ ‘트랙 잠바’ 등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스포티룩’의 대명사로 꼽히는 일명 ‘아디다스 라인’(세겹의 세로줄이 그려진 것) △일반적으로 ‘쭈리’라는 속칭으로 불리는 저지 소재 △80년대 풍의 반질반질한 폴리 소재로 만든 운동복이 2003년형 ‘트레이닝 패션’의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더해 복싱 선수들이 즐겨 입는 스포츠 잠바나 복싱용 운동화, 모터사이클 재킷 등이 길거리에, 또 백화점 매장에 넘실대고 있다.
세계 주요 패션 거리에서는 위 아래 모두를 운동복 스타일로 코디한 ‘트랙 슈트’를 입은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미국 뉴욕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주시 쿠튀르’라는 브랜드는 벨벳 소재로 만든 트랙 슈트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조차 이 브랜드의 트랙 슈트를 구하기 위해 안달이 났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스포츠 전문 브랜드가 아닌 데얼스, 틸버리, 조앤루이스, A6 등의 기성복, 캐주얼 브랜드들에서도 오리지널 스포츠 아이템들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최근 패션계에서는 스포츠가 최대 이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트레이닝 패션’, 보다 광범위하게는 스포티룩이 득세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거액의 상금 또는 연봉을 받는 스포츠 스타들이 연예인처럼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하위 문화 또는 ‘비주류 패션’으로 분류됐던 스트리트 패션이 거꾸로 ‘주류 패션’인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에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라이프스타일이 캐주얼해진다는 점 등이다.
물론 스포츠가 패션에 등장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프라다가 90년대 중반 패션계의 거목으로 등단한 데에는 나일론천 등을 사용한 실용적이고 스포티한 라인을 접목시키는 뛰어난 감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 요지 야마모토가 아디다스를 컬렉션에 도입한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전 시즌에도, 그 전 시즌에도 우리는 스포츠를 얘기했었다. 그럼에도 새삼스럽게 왜 또 스포티룩인가.
● 스포티룩의 진화
이제는 스포티룩이 특정 기간에 반짝 인기를 끌고 마는 ‘양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션의 한 굵은 줄기로서 시즌마다 새로운 스포티즘 트렌드를 형성하고 꿋꿋이 계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스포티즘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2000년대 초의 스포티룩은 스니커즈와 정장을 매치하는 것이었다. 점차 스포츠적인 요소를 조금씩 가미하면서 영향을 넓혀 가던 스포티즘은 이제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우는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올 봄, 여름에는 80년대풍 패션의 인기와 함께 이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블루종 스타일의 트레이닝복 상의와 트레이닝 바지를 곁들인 ‘트랙 슈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캐주얼 브랜드마다 모터사이클 룩, 테니스와 조깅 스타일, 복싱에 이어 최근에는 요가용 라인을 선보이고 있으며 루이뷔통, 발렌시아가, 프라다에서는 2003년 봄, 여름 컬렉션에서 스쿠버다이버를 연상시키는 아이템을 내놓았다. 스포티즘이 다양한 변종을 선보이면서 패션이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욕구를 계속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증거다.
신발에서도 스포티즘의 인기가 묻어난다. 폴 스미스는 리복과 함께 80년대 스타일의 컬러풀한 스니커즈를 선보였고 아디다스는 복싱화처럼 발목 위까지 감싸는 스타일로 70년대 말, 80년대에 디자인된 ‘Monza’, ‘GSG9’ 등을 다시 내놓기 시작했다. 70년대 크로스컨트리 스키어들이 즐겨 입었던 트렉톱도 출시할 예정.
스포츠가 매력적인 것은 활력과 열정이 있고, 거기다 언어를 초월하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스포츠 트렌드가 여러 모드로 얼굴을 바꾸어가며 장수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스포츠의 특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현재 서울을 비롯해,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 등에서 똑같이 ‘트레이닝 패션’이 인기를 끄는 것은 스포티즘의 건강한 전염성 때문.
올림픽의 고향, 그리스 아테네에서 내년에 열릴 예정인 올림픽을 통해 스포츠 트렌드는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또 어떤 종목의 어떤 아이템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현주 퍼스트뷰코리아 패션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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