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그 옛날 아버지께 타 쓰던 용돈처럼 이제 우리는 또 저세상에 계신 아버지께 영혼의 용돈을 달라고 졸라대는 건 아닐까. 살아생전 용돈 한 번 드려보지 못했다. 남은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종군작가단의 일원이었고 전쟁 직후 신태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신태양, 여상, 명랑, 실화, 소설공원, 흑막, 내막 등의 잡지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던 우리나라 출판계에 주요한 출판인이셨다. 1988년 겨울,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딸을 보러 오신 아버지는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셨다. 이곳이 어디 사람 살 곳인가. 거지들과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거리의 쓰레기들, 낡은 지하철역에서 풍겨오는 오물냄새…. 아버지는 시집을 잘못 보낸, 하나밖에 없는 딸을 친정으로 데려가듯 자꾸만 돌아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겨울이었다.
어릴 적 식사시간에 밥 먹기가 싫어서 숟가락으로 떡을 치고 있으면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다 먹지 말고 남겨라. 한 숟갈이라도 배부르면 다 먹지 말고 남기는 게 건강에 좋다.” 그렇듯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 결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농담조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닮아 이기적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엄마를 닮았다면 벌써 어떤 놈한테 끌려가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씩씩하게 살면서 그림 열심히 그리는 내 딸이 자랑스럽단다.” 아버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마흔 살 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실 것만 같다. 그렇고 말고….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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