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15…명멸(明滅)(21)

  • 입력 2003년 5월 14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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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꿈속에 잠겨 조금씩 녹아드는 것 같은데 맥박과 함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만 절실하게 존재한다 시간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때는 의식하지 못할 뿐 사실은 이렇게 아픔을 동반하고 큐우 파아 큐우 파아 호흡을 몇 번 거듭하다 보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꿈속의 풍경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그리하여 더 이상 떠올릴 수조차 없어진다 그러나 동생도 집도 마당도 비도 꼼짝 않고 내 눈앞에 멈춰 있다 입 주변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나는 동생에게 얻어맞은 것인가? 맞았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장도칼로 목을 후벼 판다 한들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지금도 그 장도칼을 쓰고 있을까? 큐우 파아 큐우 파아 나는 열 손가락을 허벅지 위에다 대고 움직이면서 호흡이 몸에 배어들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말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눈과 턱을 약간 들고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동생의 키가 나보다 컸다

산소는 어디고

교동이다

가자 앞서라

나는 동생이 내미는 우산을 펼쳤다 마루에서 두 딸이 나왔다 못 본 동안 부쩍 컸다 미옥이는 열두 살 신자는 다섯 살 후드득후드득 고인 물에 빗방울이 떨어져 무수한 파문을 만들고 비학산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나무들과 집집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휭-휭 휭-휭 나는 작은딸을 안아 올려 우산을 씌워주고 동생의 등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휭-휭 휭-휭 작은딸을 업은 채로 질퍽질퍽한 산길을 올라갔다 고무신 안으로 물이 들어와 걸음걸음마다 처벅처벅하고 소리가 났다 어머니의 무덤은 교동 제삿마루 비탈 키 큰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었다 아직 흙냄새가 풍기는 새 무덤이었다 나는 딸을 내려놓고 그 무덤과 대면했다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현실로 인식한다 북받치는 설움에 두 손 모아 빌 수도 없었다 할머니와 엄마를 한꺼번에 잃고서 손을 꼭 마주잡고 있는 두 딸의 앞머리가 비에 젖어 있었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 큰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하고 같이 살 수 있나? 라며 훌쩍거리는 작은딸의 콧물을 손으로 닦아주고, 그래, 라고 대답하려는데 목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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