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임기마친 지명관 KBS 이사장]"미래 어둡다"

  • 입력 2003년 5월 15일 22시 15분


원대연기자
원대연기자
《15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년의 KBS 이사장 임기를 마친 지명관(池明觀·79) 이사장은 “정치권이 총선이나 대선용으로 방송을 장악하려는 단견(短見) 때문에 한국 방송이 진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KBS 사장이나 방송위원회 위원장 등이 지금처럼 정치적 파당의 이해에 따라 선출된다면 한국 방송의 미래는 지극히 어둡다”고 말했다.》

지 이사장은 5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14일 경기 안양시에 있는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서 본보와 두 차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정연주 KBS 신임 사장 선출 과정에서 청와대측이 개입했다고 발언한 1일 이후 말을 삼갔으나 “나라와 방송의 앞날에 대한 충정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남기고 싶다”며 흉중에 담아두었던 말을 토해냈다.

―1일 KBS 정연주 신임 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지난달 30일 정 사장과 첫 이사회를 가졌다. 통상 본부장들이 배석하는데 정 사장은 취임 이틀 만에 임원들에게 모두 사표를 받고 혼자 들어왔다. 안건에 KBS 재정문제가 있었다. 지난해 KBS가 1000억원 이상 이윤이 남아 보너스를 200%씩 지급한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는 적자였다. 회사측은 ‘결손이 나야 정부에서 돈을 얻지 않느냐’고 했다. 문제는 이런 재정 상태에 대한 정 사장의 인식이었다. 한겨레 출신인 정 사장은 ‘재정상태가 한겨레보다 낫네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KBS와 한겨레의 재정을 비교하는가. 또 정 사장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 개편을 전부 중단시켰고, 중요 프로그램은 그때그때 지시하겠다’고 한 발언에 더 놀랐다. 정 사장이 기존 전통을 계승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어나갈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걱정이 돼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KBS 이사회의 정치적 독립성은….

“KBS 이사회란 묘한 위치다. 정부에서 KBS 사장을 임명하니까 정부의 생각을 무시하기 어렵다. 사장 공모제로 40∼60여명이 후보에 올랐지만 이사진이 후보의 면면을 알 수 없다. 추천제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고 결국 정부로부터 입김이 있었던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출하게 됐다.”

―이사장 재직시 정권의 압력이 있었나.

“DJ 집권시절 박권상 사장도 청와대 주변에서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있다. 박 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을 독대해 ‘나하고 운명을 같이하자’는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정 사장의 인사에 항의 편지를 보냈는데….

“정 사장은 이틀 만에 부사장과 본부장 7명을 교체하는 등 혁명 같은 인사를 단행했다. 물러난 이들로부터 현황보고나 업무인계도 받지 않고 사표를 받은 것은 KBS의 소중한 인적 자산을 스스로 내친 것이다. 재벌도 이렇게 매정하게 쫓아내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혁명을 해야 하는 시기는 지났다. 노 정권에 대해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새 시대를 열어달라는 것이지, 정권이 바뀌면 제 사람 넣고 다른 사람 배제하는 구태를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네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조급증 갖고는 민주주의를 하지 못한다.”

―KBS의 미래와 위상에 대한 고언을 해달라.

“서동구 사장이 낙마하고 난 뒤 더 이상 외부사람에 의한 KBS 개혁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방송 비전문가가 사장으로 들어와서 정치적으로 사람을 앉히고 뒤흔들고 하다 보면 어물어물 3년이 다 간다. 이렇게 밖에서 사장을 데리고 오고, 임원들을 전부 내쫓는 방식이 ‘내부 투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이래선 KBS가 불행해진다. 일본 NHK의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 회장은 9년째 직무를 수행하면서 공영방송의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KBS도 내부를 안정시켜가면서 지속적인 경영합리화와 개혁을 이뤄낼 리더십이 필요하다.”

―KBS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정연주 사장을 뽑았으며 청와대측의 압력은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정 사장은 5표를 얻었다. 재적과반수(6표)가 안돼 나중에 문제될 것이라는 지적에 따라 정 사장을 정한 뒤 추천서류를 만들어 사인한 것이다. 만장일치가 아니라 서류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청와대측의 압력은 나 혼자만 받았나 보다.”(웃음)

―한국의 언론 상황이 갈등과 대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모든 언론이 대립하는 것은 문제다. 경쟁은 좋은데 상대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는 해선 안 된다. 언론이 서로 경쟁하면서 영향을 주고 공존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싸우기만 할 뿐 새로운 비전을 세우지 못한 채 벽만 쌓아가고 있다.”

―현 정부의 개혁은 무엇이 문제인가.

“노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일본 잡지 ‘세계(世界)’와의 대담에서 나는 노 대통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노 대통령의 말 중에 ‘개혁은 계단을 올라가듯 가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흘러가서 어느덧 개혁이 돼야 하는 것이다’는 말을 일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취임 이후 노 대통령이 보여준 행보를 비춰보면 이 말대로 되지 않고 있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쓸데없이 파란을 일으키고 매사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지명관 이사장은 누구인가 ▼

지명관 이사장(한림대 석좌교수·일본문화연구소장)은 최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묘지를 찾았다. KBS 사장 선출 문제와 관련한 청와대측 개입 폭로 이후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자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서 그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지 이사장은 평생을 학자로 살아오며 반독재와 반냉전을 주장해 온 대표적인 지성인. 1960년대 월간지 사상계의 주간으로 활동했으며 1973년 박정희 정권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외 매체에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칼럼을

써왔다. 1993년 귀국한 뒤 한림대 일본문화연구소장을 맡았다. 지난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선언에 참가했으며 노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지 이사장은 “지지했던 후보가 너무도 빨리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청와대는 어떤 신문 얼마나 구독하나
- '국회 대리戰' 방송위 해법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