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주 풍경전' 연 서양화가 강요배

  • 입력 2003년 5월 27일 18시 16분


서양화가 강요배(51·사진)가 6월11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제주민중항쟁사전’ ‘4·3역사화전’을 통해 민중작가로 알려진 그가 94년 ‘제주의 자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는 제주 풍경전이다. 전시 준비차 서울에 올라 온 그를 만났다.

야윈 몸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그는 과묵했다. 묻는 말에도 “글쎄요…” “뭐랄까…”하고 얼버무리는 식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겉돎’은 80년대를 풍미한 민중 작가라는 타이틀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때 그가 그린 캔버스 주인공들의 날 선 분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제 민중을 버린 것일까.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민중에서 자연으로’ 예술세계 넓혀

“4·3 그림을 끝으로 제주로 내려가 자연을 그리니 (나더러) 변했다고 합디다. 하지만, 자연이란게 뭡니까. 민중들의 삶의 공간 아니겠소. 내게 제주의 자연은 ‘변절’이 아니라 ‘확장’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은 좀 독특하다. 대학시절(서울대 미대)엔 ‘아름다움은 초월’이라고 믿으며 현실문제엔 관심이 없다가 오히려 제도권(창문여고 미술교사)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학생들에게 고급 미술을 귄위주의적으로 강요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나의 미의식 역시, 제도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전시장맨끝 벽에 걸려 있는 '달'. 청색 녹색 회색을 섞어 암청색에 가까운 바탕 화면에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보름달은 언뜻 따뜻한 느낌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찬 겨울 밤에 하늘을 올려다 본 것 처럼 퍼뜩 정신이 든다. 사진제공 학고재 화랑

그는 교과서를 제쳐놓고 다양한 미술교육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81년부터는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대상황에 저항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6년 뒤, 학교를 그만뒀다. 보람도 있었으나, 비상을 꿈꾸는 예술가에겐 ‘족쇄’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부도가 나는 바람에 참혹한 가난으로 내몰려야 했다. 잦은 폭음으로 88년 위의 3분의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지요. 죽기 전에 4·3은 그려 놓고 가야지 하는 오기가 생깁디다.”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4·3은 유전자에 각인된 부채(負債)였다. 3년간 미친 듯 4·3 형상화 작업에 매달린 그는 92년 전시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갔다.

“삶의 풍파에 시달린 자의 마음을 푸는 길은 오직 자연 뿐이었습니다. 자연의 천변만화를 보면서, 인간은 오죽하랴 싶더군요. 화창한 봄날은 극락이고 먹구름은 불안이고 억압이고. 인간에게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산의 분화구, 나무, 돌멩이에도 역사가 있습디다. 캔버스에 자연을 그린 것은 내 나름대로 역사와 시대에 대한 내면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는 자연을 소재로 자신의 격정과 외로움을 실었다. 그의 그림이 단순히 풍경화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치열하게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캔버스에 인간의 표정은 없지만, 해, 달, 별, 산, 바다에 희로애락의 모든 표정이 담겨 있어 삶과 역사를 실은 실체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민중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이 다가간 것일까.

황파 l 181.8×259.1㎝, 2002

# 제주의 풍광에 격정 외로움 담아

최근작들이 더 밝아진 느낌이 드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비양도의 봄바다’나 ‘문주란 섬’, 쪽빛 바닷 물결을 그린 ‘천수(天水)’ 등에 사용된 진노랑, 파랑, 초록 등에서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흰 물결의 포말을 실감나게 그린 대작‘황파(荒波)’앞에 서면 생존의 지평에서 시련을 만나 견뎌야 했고 삶의 길에서 만났던 이들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방황했던 한 사나이의 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돌아와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한참을 배회했다는 그가 이제야 떠도는 자가 아니라 붙박인 자로서 제주에 정박한 것일까. 02-720-1524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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