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열광’국민 에너지…사회변혁 동력 분출 한계
▽정치, 사회적 영향=기업들은 기본을 강조하고 혁신을 추구하는 히딩크식 경영 모델을 분석해 앞 다투어 기업 경영에 도입하기 위해 애쓰는가 하면 정치권 역시 서열주의를 버리고 능력 위주의 용병술을 정치에도 접목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또 태극기를 두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국민들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등 자긍심이 한껏 고양됐다.
무엇보다 ‘길거리 응원’이라는 집단적 체험은 이후 대규모 촛불시위,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열풍, 반전평화운동 등을 촉발하면서 20, 30대 젊은층의 사회참여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국회도서관 이만우(李晩雨·사회학 박사) 입법정보연구관은 “다함께 광장에 모여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했던 월드컵 응원은 이후 다양한 사회적 사안에 대해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하고 그 실천 방식을 제시한 셈”이라고 말했다.
20, 30대의 사회참여는 거리 응원 경험과 함께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 기능이 결합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이들은 미군 장갑차에 의해 숨진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에 참가해 슬픔과 분노를 거리낌 없이 표현했으며 정치적 의견을 같이한 20, 30대들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면서 대선 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적 의견 표출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으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화물연대파업,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등 각종 현안을 둘러싸고 집단별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상은 거리 응원의 위력을 맛본 사람들이 ‘다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점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청소년개발원 최원기(崔元起) 연구위원은 “‘붉은 악마’가 힘을 발휘하면서 다수의 가치가 사회 정의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포퓰리즘 성향이 강화되고 있다”며 “선을 넘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을 적대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처럼 사회적 대립이 극단화되고 있는 데 대해 월드컵을 통해 분출됐던 한국인들의 역동적 에너지와 참여정신을 제도적으로 반영할 방안을 마련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비정치적인 국가 이벤트였긴 하지만 월드컵을 통해 세대와 계층, 이념을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됐던 경험은 집단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금, 사회 통합을 위해 반드시 돌이켜봐야 할 소중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국가브랜드 연계전략 차질…“30조 경제효과”는 장밋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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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효과=KOTRA는 최근 월드컵 1주년을 맞아 해외 99개 전 무역관을 대상으로 국가이미지 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월드컵 직후 벌인 조사에서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상품 이미지가 10%포인트 이상씩 급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해외무역관이 보낸 답변서는 지난해만큼 고무적이지 못하다. 월드컵이후 세계시장에서 ‘코리아 브랜드’의 인지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한국 상품에 대한 구매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이선인(李善寅) KOTRA 중동·아프리카 지역본부장은 “월드컵 직후 한국 수출기업의 대리점 영업권을 따내기 위해 중동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열기가 식었다”면서 “중동 현지인들이 쓰는 일반 생필품에서 한국 상품의 매출이 크게 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LG전자 등은 월드컵 직후 터키, 중동,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열풍이 불기는 했지만 지난 1년 동안 매출이 크게 늘지는 않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와 경제단체들은 월드컵의 경제적 효과가 최대 25조∼3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월드컵 직전에는 경제효과가 10조원 정도로 예상됐으나 한국 대표팀이 4강에 오르면서 기대치는 3배 가까이 불어났다.
그러나 월드컵의 경제효과에 대한 기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크게 빛이 바랬다. 북핵 사태와 이라크전쟁,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의 영향으로 3월과 4월 외국인 관광객은 각각 전년 대비 10%와 28%씩 감소했다.
지난해 중반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외국인투자는 올 1·4분기(1∼3월)에는 지난 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올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경쟁력 조사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5단계 떨어진 15위에 올라 대만, 말레이시아, 태국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전문가들은 포스트월드컵 경제효과가 미흡한 가장 큰 원인은 월드컵을 국가 브랜드 전략과 연계하는 치밀하고 지속적인 후속 조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양대 예종석(芮鍾碩·경영학) 교수는 “월드컵과 같은 국가적 행사를 이미지 제고와 연결시키려면 군사작전만큼이나 치밀한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면서 “국가이미지제고위원회는 지금까지 2차례 회의를 가졌을 뿐 국가브랜드 전담기구로서 거의 활동이 없다”고 지적했다.
현대경제연구원 박태일(朴泰一) 수석연구원은 “국가 이미지 개선은 ‘인지’와 ‘친숙’의 두 단계 과정을 거치는데 한국은 월드컵을 계기로 인지도를 높인 정도”라며 “한국 상품 가격이 경쟁 선진국에 비해 10∼20% 낮게 책정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없애기 위해서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지속적인 ‘국가 브랜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禁忌는 없다”어울림의 미학…“무리지어 즐겨보자” 확산
▽문화적 영향=열린 공간에서 ‘무리지어’ 즐기는 문화가 확산됐다.
가수들의 공연장이 대표적 사례. 월드컵 이후 콘서트 관객들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변했다.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보수적인 관람 문화도 바뀌었다. 가수가 유도하지 않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거나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무리지어 즐기기’는 이미 대세로 자리 잡았다.
공연기획사 ‘좋은 콘서트’의 최성욱 대표는 “월드컵이란 빅 이벤트를 통해 ‘어깨를 부딪치는’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직접 대면해 공감하고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월드컵 이후 ‘공짜 이벤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이벤트는 모두 무료였다. 공연기획사 ‘플래너’의 박민희 대리는 “40% 정도였던 초대권 회수율이 월드컵 이후 100%에 달한다”며 “기업체가 홍보이벤트로 마련한 콘서트에도 관객이 붐비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의 문화 교류와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일본에서 가수 보아와 탤런트 윤손하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선 일본 배우 및 가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면서 일본 출신의 탤런트 유민이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단체 관광객들이 국내 영화 촬영 현장을 돌아보는 상품도 인기다. 배우 장동건 원빈이 주연인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경주 촬영 현장을 둘러보는 관광 프로그램은 400명 모집에 4000여명이 몰렸다. ‘태극기’가 영화 제목에 등장하거나 태극기 패션이 일상화되는 등 태극기에 대한 금기가 사라진 것도 큰 변화다.
월드컵 ‘붉은 악마’의 활약 이후 빨간색과 이를 변형한 진한 핑크 의상이 유행하고 있다. 운동복 스타일의 캐주얼 의류가 일반화되고 월드컵 스타들의 유니폼이 유행하면서 ‘스포티즘(Sportism)’이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기도 했다. 얼굴에 다양한 문양을 그리는 페이스 페인팅의 보편화도 월드컵 이후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즐기는 의식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축구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방송사들이 영국 ‘프리미어 리그’ 등 유럽 각국의 주요 리그를 비롯해 축구 중계 편성이 늘었다. 또 고화질(HD) TV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최근 지상파 3사는 HD 프로그램의 제작을 늘리고 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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