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 마제스틱 극장 안. DAY
해리:(피터를 데리고 극장 로비를 걸으며) 남자건 여자건 어린아이건 누구나 표를 사서 꿈속으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극장에 들어가지. 바깥 세상엔 근심과 두통거리가 있어도 일단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런 건 더 이상 문제가 안돼. 왠 줄 알아?
―피터가 모르겠다는 표정이자 해리, 피터를 데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해리:채플린 때문이지. 키튼, 가르보, 프레디와 진저 때문이야. 그들은 극장 안에 사는 신이고 극장은 올림푸스야. TV? 도대체 어떻게 혼자 거실에 앉아있는 걸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를 수 있지?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관객은, 신비한 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극장 안에서는 신비한 힘이 관객들을 감싸지. 그 마법의 트릭은 그냥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그 자체야.
(영화 ‘마제스틱’에서 해리가 기억을 상실한 시나리오 작가 피터에게 극장 재건 계획을 설명하는 장면)》
# 멀티플렉스는 현대의 올림푸스
멀티플렉스는 1950년대 해리의 극장보다 지상에 더 가깝게 군림한 현대의 올림푸스다. 멀티플렉스의 긴 복도에는 제의적 마력이 있다. 표를 사서 입장한 뒤 기다란 복도를 따라 각각 소형 신전처럼 줄지어 있는 상영관 앞을 걷다보면, 현실을 떠나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 올림푸스에서 판타지의 제의에 참여하는 관객들은 더 이상 경건하지 않다. 그들은 아무 곳이나 달려가지 않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해 말 발표한 ‘영화관객의 관람행동 조사’에 따르면 이제 관객들은 영화를 고를 때 출연배우(49.1%)나 감독(24.9%)보다 영화관 위치(60.4%)와 시설(58.5%)을 먼저 고려한다.
웹 디자이너 전예진씨(26·여)는 집이 경기 용인시 수지인데도 영화는 메가박스에 가서 본다. 왜냐고 묻자 그는 “극장이 영화보다 더 중요하다. 시설이 깨끗하고 좌석도 편해야 하며 주변에 볼 게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멀티플렉스는 놀이터다. 마일리지 할인혜택, 서비스, 부대시설에 따라 성패가 판가름이 난다. 멀티플렉스마다 앞다투어 서비스와 마케팅 경쟁을 벌여 CGV는 줄을 서지 않도록 은행처럼 순번발권기 시스템을 도입했고 부부 관객을 위해 유아놀이방 서비스도 하고 있다. 메가박스는 SBS 드라마 ‘스크린’의 촬영을 위해 극장을 통째로 제공하고 간판도 드라마 속 이름인 ‘세가박스’로 바꿔 달았다. 멀티플렉스의 서비스 경쟁은 개봉일을 점점 앞당겨 메가박스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새 영화를 바꿔달고 있다. 멀티플렉스와 한국 코미디 영화들의 강세가 불가분의 상관관계에 있듯, 멀티플렉스는 예술에서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이제 레저처럼 된 영화의 관람 문화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 라이프스타일도 변했어요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강변 CGV11이 문을 연 98년 4월과 올해 4월을 비교해 본 결과, 하루 관객 가운데 오전 11시 이전 조조 관객 비율은 4%(1998년)에서 10%(2003년)로 늘었고, 밤 10시 이후 심야 관객은 5%(98년)에서 16%(2003년)로 늘었다. 5년 만에 이른 아침에 영화를 보는 사람이 2.5배, 한밤중에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이 3배 이상 늘어난 것.
영화관람은 주말이 제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화진흥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시간대는 평일 오후가 30.9%로 가장 많았다. 2001년에 토요일 오후가 가장 많았던 것(41.1%)과 비교하면 멀티플렉스가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주거지와 백화점을 파고든 멀티플렉스는 지역마다 관객들이 다른 특색을 띤다. 강변 CGV11에는 25세 이하의 관객들이 많다. 이곳에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카펫 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영화를 보러 들어가는 10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메가박스 관객의 주 연령층은 24∼34세로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롯데시네마는 다른 멀티플렉스 체인에 비해 30대 이후 여성관객이 압도적으로 많다.
비수기와 성수기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매트릭스 2 리로디드’가 상영 중이던 지난달 24일은 전통적인 비수기였지만 메가박스에서는 토요일 하루에만 성수기 수준인 2만7000명의 관객이 들었다.
# 지역마다 잘되는 영화 달라요
관객의 특성 차이는 지역에 따라 잘 되는 영화가 약간씩 달라지는 ‘멀티플렉스 맞춤형 영화’를 낳는다. 이제 영화라고 다 같은 영화가 아니다. 담는 그릇(극장)에 따라 내용물 (영화)이 달라진다. CGV의 지점마다 평균 객석 점유율이 다른 곳보다 높고 상대적으로 장기간 상영하는 영화들을 조사한 결과, 젊은 남자관객의 왕래가 잦은 CGV강변11에서는 ‘블랙호크 다운’ ‘위워 솔저스’ 같은 전쟁 영화가 강세를 보였다. 또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은 CGV구로, 분당 오리점에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어린이 영화, 가족영화가 압도적 강세를 띠었다.
주부들의 단체관람이 잦은 CGV목동점에서는 다른 극장에서 흥행이 부진했던 ‘언페이스풀’ 같은 불륜 영화가 잘 되는 이변을 보이기도 했다. 20대 여성 유동인구가 많은 CGV명동점에서는 ‘오버 더 레인보우’ ‘피너츠 송’ 같은 로맨스 영화가 다른 곳보다 잘 된다.
또 백화점에 자리를 잡은 롯데시네마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 덕분에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흥행 수익이 상대적으로 높고, ‘고스포드 파크’ 등 외국 예술영화들이 외국인 관객이나 상영작의 원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관객이 많은 메가박스에서 잘 된다는 것도 멀티플렉스의 보편화가 가져온 이색 풍경들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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