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o, Ego, Ego….”
끊임없이 ‘Ego(자아)’를 읊조리며 ‘나’를 끌어내는 김태근의 음악은 영혼의 욕망을 부르는 주문이다. 카페에 점잖게 앉아 있던 선남선녀들은 오랑우탄이 되고, 늑대가 되고, 요부(妖婦)가 되어 자아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낸다.
‘나는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가지고 살아갈까?’ 한 개의 그림자로는 부족했는지 ‘쉐도우 카페’에 이은 제 2부에서는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가 펼쳐진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다중인격’이라 하겠지만 이것은 늘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모습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성실한 직장인인 동시에 그녀의 귀여운 애인이고 어머니의 믿음직스런 아들이며 동창들의 허물없는 친구이기도 하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에게는 더 많은 다중인격이 요구된다.
일상의 삶은 김태근의 휘파람 선율처럼 달콤하고 조화롭지만 그 휘파람이 은근히 자극하며 다독여주는 욕망들은 출구를 찾아 헤맨다. 그림자의 춤은 부드럽게, 자아의 춤은 강렬하게, 그림자와 자아가 서로 밀고 당기는 춤은 불규칙적이고 비선형적이다.
그러나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기 곤란한 욕망도 있다. 처절한 ‘인정투쟁(認定鬪爭)’의 혈투와 벌거벗은 원초적 욕구들…. 이것들은 무대 뒤의 스크린에 그림자극으로 연출됐다.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절대로’ 표현해선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간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홍승엽이 추구해 온 자아 정체성의 진지한 탐구가 경쾌한 에피소드와 함께 진행됐다. 그답지 않게 가벼워졌다는 지적도 있지만, 자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좀더 여유로워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 모든 그림자들은 결국 한 사람의 다면성이었다. 하지만 빼어난 춤꾼 김선이도 10여 개에 달하는 그림자를 혼자 아우르기는 좀 역부족이었다. 자아로부터 풀려난 그림자들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의 주변에서 떠돌고 말았다. 그런데,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 뒤에 있는 ‘나’는 반드시 하나여야만 할까?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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