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용, 어린이용, 만화 등을 제외하고서도 이미 ‘이문열 평역 삼국지’ 등 10여종이 경쟁해온 국내 ‘삼국지’ 시장 판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방북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97년 번역을 시작했죠. 교도소에 ‘집필할 권리’를 빼앗긴 시절이었는데, 번역만은 허락하더라고요. 베를린에 살 때 그곳 학생들이 로마 고전을 라틴어로 술술 읽는데 충격이랄까 자극을 받기도 했고, ‘장길산’을 쓰면서 익혀둔 고전강독 지식도 잊어가던 터라 잘됐다 싶었습니다. 출옥 후 신문 연재소설 등에 매달리다 보니 조금 늦어졌어요.”
그의 고정팬들은 ‘장길산’에서 보여준 발랄하고 장쾌한 입심이 삼국지에서 어떻게 ‘황석영류’로 전개되는지 궁금할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원전(原典)에 충실하는 데’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박태원판 ‘삼국지’를 처음 읽었지요. 중국어 원본을 꽤 충실히 번역한 판본이었죠. 그 뒤 수많은 삼국지를 읽었지만 ‘박태원판만 못하다’는 생각을 쭉 갖고 있었어요. 여러 작가들이 자신들의 관점과 해석에 맞춘 삼국지를 내놓고,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지금은 다시 ‘고전의 맛’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어요.”
번역의 줄기가 되는 원서도 꼼꼼히 골랐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국내 번역본들은 대개 대만 삼민서국(三民書局)에서 나온 ‘삼국연의’를 원본으로 삼았지만 그는 199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나온 ‘수상(수像)삼국연의’를 원본으로 했다. ‘수상삼국연의’는 청대에 나온 ‘모종강본’ 삼국지의 번잡한 가필을 바로잡고 명대 나관중의 원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판본으로 꼽힌다. 성균관대 임형택 교수의 도움으로 원문에 실린 한시도 빠짐없이 번역 수록했다.
“의고체 문장을 버리고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힘썼지만 그렇다고 직역만 한 건 아니에요. ‘삼국지’ 원본의 전투장면은 매우 ‘드라이’해서 ‘한방에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하고 끝내는 식이니까요. 그래서 전투장면은 내 스타일로 실감나게 써봤죠. 꽤 재미가 있을 겁니다.”
그는 ‘삼국지’를 번역하다 보니 사고방식도 바뀌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역사는 ‘큰 선’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안달복달하지 않게 됐다고 할까요. 전에는 나름의 기준에 따라 나쁜 놈이다 좋은 놈이다 하고 사람을 재단했는데, 삼국지에 매달리고 나니 사실 사람과 가치들 사이에 ‘큰 차이’는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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