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성에꽃' 이원규

  • 입력 2003년 6월 27일 17시 31분


▼성에꽃▼이원규

밤마다 그가 온다

이미 죽은 소

나의 기막힌 사랑

죽은 소

둥두둥

쇠북을 치며

삼보일배三步一拜로 다가와

불면의 창을 여본다

푸우,

가쁜 숨을 내쉬며

언 유리창에

신열의 이마를 대자

지지직 금이 간다

산산조각이 난다

멈칫 놀라 그가 물러선다

쇠북소리가 멀어지고

영하의 겨울 먼동이 트면

꿈이었나 꿈이었나

두 눈을 꿈벅이며

유리창 너머 지리산을 바라본다

죽은 소의 콧김인가

오늘 아침에도 성에꽃 피었다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중에서

오뉴월 염천 아래 성에꽃이 피었다. 동장군의 호위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온 성에꽃 한 점.

저 하늘의 대기 중에 생명의 허파를 드나들지 않은 것이 한 줌 있을까? 때론 웃음으로 번지고 때론 한숨으로 꺼지며 산 것들의 영욕을 함께했을 터이지만 지리산 자락을 타 넘어오는 저 콧김이 예사롭지 않다.

‘이미 죽은 소’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한다. 어쩌면 내가 저 ‘죽임’에 가담한 게 틀림없다는 공범(共犯)의식에 사로잡힌다. 내가 죽인 ‘나의 기막힌 사랑’이여. ‘둥두둥’ 쇠북소리가 잠들지 못하는 나를 추궁한다.

‘이미 죽은 소’, 저것은 개인의 아픔일 수도 있지만 지리산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공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소의 발자국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저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형제요, 핏줄이요, 이념이요, 또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틀림없다. 그뿐일까? 비단 ‘잃어버린’ 것들만이 아니라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 또한 저 죽은 소의 그림자를 부풀리고 있을 것이다.

쿵쿵쿵… 오늘도 뜨거운 성에꽃을 피우러 불면의 창가로 오는 우리들의 죽은 소는 무엇인가?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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