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로 타계 박동진옹…하늘 무대로 간 지상의 명창

  • 입력 2003년 7월 8일 18시 14분


박동진 명창은 기존의 유파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관객과의 교감을 중시해 공연 현장을 열기로 가득채운 ‘타고난 소리꾼’이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박동진 명창은 기존의 유파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관객과의 교감을 중시해 공연 현장을 열기로 가득채운 ‘타고난 소리꾼’이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8일 타계한 박동진 명창은 ‘토막소리’ 위주이던 판소리계에 완창 판소리의 새바람을 일으킨 판소리계 대들보이자 국악 보급과 대중화에 큰 공을 세운 국악계 거목으로 꼽힌다. 그의 창작 판소리인 ‘예수전’ 완창 요청이 천상에서도 빗발쳤던 것일까. 와달라는 곳이 있으면 가족과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람같이 종적을 감췄던 습관처럼, 내세로 가는 발걸음도 그렇듯 갑작스러웠다.

오랜 세월 그와 호흡을 맞춘 고수 김청만씨는 “이 시대 최고의 명창인 큰 별이 떨어졌다”며 애도를 표시했다. 안숙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도 “고인은 항상 국악 대중화의 최전선에 있었고 한때 쇠락해가던 판소리 중흥의 씨앗을 뿌렸다”고 추모했다.

1998년 생가가 있는 충남 공주시 무릉동에 박동진 판소리전수관을 짓고 생활해온 박 명창은 오전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두 시간 동안 땀이 흥건할 정도로 창을 한 뒤 목욕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왔다. 함께 생활해온 제자들은 “돌아가신 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욕실에 들어가셨는데 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았더니 욕조에 누우신 채 의식이 없으셨다”고 안타까워했다.

1916년 공주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 명창은 중학시절 우연히 당대의 명창인 이화중선 이동백 등이 출연하는 ‘협률사’ 무대를 보고 ‘인간인가 신선인가 눈깔이 홀랑 뒤집히는’ 희열을 경험한 뒤 집을 나왔다. 춘향가의 대가 정정렬을 찾아 계룡산으로, 수궁가의 유성준을 찾아 경주로 가는 등 전국을 유랑하며 명창을 찾아다녔다. 그는 “꾸지람도 매도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짐 싸서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나올까봐 가장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젊은 소리꾼으로 제법 대접받던 20대 후반, 그는 무절제한 생활로 소리를 잃고 만다. 목소리를 찾기 위해 충남 대덕군(현 대전 유성구 원내동)의 토굴에서 생쌀을 씹어 먹으며 독공에 열중했다. 40여일 동안 소리만 질러댔더니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소리독에 똥물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부친이 가져다 준 삭은 똥물을 마시니 거짓말처럼 부기가 빠졌다는 일화는 국악계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100일을 채운 뒤에야 토굴에서 내려왔지만 예전의 소리를 되찾지 못한 그는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고수 무대감독 등의 잔일을 했다. 6·25전쟁 직후 만난 두 번째 부인의 내조 속에 하루 10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공부에 전념한 그는 결국 소리를 되찾아 쉰이 넘은 68년 일생일대의 실험인 ‘흥부가’ 완창무대에 도전한다.

국악 관계자들마저 ‘말이 안 된다’며 제지하는 바람에 무대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지만, 다섯시간반 동안 이어진 ‘흥부가’ 완창은 당시 눈대목(하이라이트) 위주로 공연되던 기존 판소리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당시 공연은 ‘미국의 소리’ 방송이 생중계하는 등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몰고 왔다. 그는 72년까지 판소리 다섯마당을 차례로 완창했고, 이를 계기로 오정숙 명창이 ‘심청가’ 완창을 시작하는 등 완창 시대가 열렸다.

뒤늦게 독실한 믿음을 갖게 된 박 명창은 70년 다섯시간반짜리 판소리 ‘예수전’을 완성한 후 ‘충무공 이순신전’ ‘팔려간 요셉’ 등 성서인물과 위인을 소재로 한 창작 판소리 발표에 심혈을 기울였다. 73년 ‘충무공 이순신전’의 9시간40분 완창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꼽힌다. 같은 해 그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다.

92년 한 약품광고에 출연해 ‘제비 몰러 나간다’는 창을 하면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대사를 했는데 이것이 유행어가 되면서 전통문화 바람을 일으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평소 “양악은 악보가 없으면 헛것이지만 국악은 오로지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고 강조해왔다. 또 한때 소리를 잃었던 경험을 토대로 “얼굴 팔리는 공연에나 힘쓰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소리꾼은 망한다”며 후진들의 분발을 당부하곤 했다.

97년 홀연히 고향 공주로 내려간 그는 사설 부분을 축약한 4시간짜리 적벽가 완창무대에 서는 등 체력이 허용하는 한 무대를 사양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에도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열린 ‘인간문화재 대축제’에 출연했다. 무대 위에서 걸쭉한 입담을 자랑했던 그는 최근에도 한 무대에 올라 “진즉 뻗었을 나이인데 하나님이 더 살다가 오라고 해서… 뻔뻔하게 나온 내가 미친 놈이여”라며 농을 하기도 했다.

국악방송(서울 경기 FM 99.1MHz, 남원 FM 95.9MHz)은 8일부터 2주 동안 오후 7시∼7시30분 고인의 삶과 국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추모 다큐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다.

▼박동진 명창 연보 ▼

△1916년 7월 12일 충남 공주시 장기면 무릉리에서 출생

△1932년 판소리 입문

△1933년 서울동양극장서 ‘춘향가’로 첫 무대 출연

△1944년 조선음악단 입단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 취임

△1967년 국립창극단 입단

△1968년 9월 판소리 ‘흥부가’ 최초 완창

△1969년 ‘춘향가’ 완창

△1970년 ‘심청가’ ‘변강쇠타령’ 완창

△1970년 창작판소리 ‘예수전’ 발표

△1971년 ‘적벽가’ ‘수궁가’ 완창

△1973년 창작판소리 ‘충무공 이순신전’ 발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지정

△1980년 은관문화훈장 받음

△1989년 서울시 문화대상 수상

△1998년 충남 공주시에 박동진 판소리전수관 건립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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