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장조 중 제3악장, 아나운서 차인태씨, 스마트 학생복과 자전거.
1973년 첫 방영돼 30년째 방송 중인 고등학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 ‘장학퀴즈’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의 방송윤리규정 강화로 개발된 국민교양 프로그램답게 ‘학문을 권장한다(奬學)’는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1970, 80년대 선경(현재의 SK)이 월장원과 기장원 학생들에게 부상으로 수여하던 학생복과 자전거의 브랜드 이름도 ‘스마트(smart)’였다.
독일 함부르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그의 저서 ‘교양(Bildung)’에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야말로 지식에 입문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문명의 대화에 참여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줄곧 MBC에서 방송되다가 1997년부터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EBS에서 방송되고 있는 ‘장학퀴즈’를 통해 우리시대 교양의 흐름을 살펴본다. 지금까지 1563회 방송된 이 프로그램에는 무려 9900여명의 고등학생이 출연했다.
#1981년과 2003년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사옥에서 1981년 3월15일 방송된 ‘400회 특집 장학퀴즈 기장원전’ 방송 테이프를 대출해 시청했고 15일에는 서울 양천구 목동 방송회관에서 진행된 ‘1569회 장학퀴즈 고수전’ 녹화 현장을 취재했다. 1569회는 다음달 24일 EBS를 통해 방송된다.
# 1981년 장학퀴즈
당시 나이 37세의 아나운서 차인태씨(현재 평안북도 도지사)와 앳된 인상의 여자 아나운서 조일수씨가 진행을 맡았다. 음악 문제 출제를 위해 ‘김동석 실내악단’이 직접 연주를 했다.
이날 출연자는 당시 18세이던 경기고 이원석, 배문고 임무영, 용산고 양영태, 인천 대건고 하광용, 경남 진주고 조현동군 등 5명. 학부모와 교사, 1973년 1기 장원인 신동준씨(당시 24세의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생)도 격려차 출연했다.
장학퀴즈는 예나 지금이나 우승한 학생에게 대학등록금을 지원한다. 아들의 성품을 묻는 차인태씨의 질문에 조현동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내성적이고 착하다”며 “가정환경적으로 뒷받침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검정색 교복차림 아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원석군의 경기고 담임교사와 임무영군의 어머니는 제자와 아들이 각각 법조인이 되고 싶어한다고 말했고, 하광용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상과대를 졸업해 무역업에 종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기장원은 법대 진학을 꿈꾸는 임무영군이 됐다. 22년이 흐른 지금 그는 부산지검 공안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씨는 15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고등학생들은 상식의 폭이 넓은 편이었다”며 “그러나 지식의 많고 적음이 결코 인생 가치의 판단 잣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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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장학퀴즈
17세 고등학교 2학년 학생 2명씩 짝을 이룬 7개 팀이 출전했다. 퀴즈 고수전은 주 장원 팀들이 모여 ‘고수’를 가리는 시합이다.
강원 춘천고 ‘갈무리’, 경기 평택고 ‘풍비박산’, 천안 북일고 ‘그레이트(GREAT)’. 서울 반포고 ‘베리타스(VERITAS)’, 대전 대덕고 ‘다스름’, 안양 안양고 ‘플라즈마(PLASMA)’, 서울 잠실여고 ‘해오름‘. 이 중 갈무리, 풍비박산, 그레이트는 비평준화 고교 팀이고, 다스름과 해오름은 여학생 팀이다.
오후 2시 녹화를 앞두고 학생들은 막바지 공부로 분주했다. 갈무리팀의 주영준군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 코리아’의 백과사전에서 돌궐, 서하, 선비 등 유목민족에 대해 검색한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서울 반포고 김문겸군은 페루의 역사에 대해 읽었다.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평택고 소민호군), “한국학 전공 교수가 되어서 세계 속에 한국을 널리 알리겠다”(잠실여고 강민정양), “과학을 전공한 뒤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겠다”(대덕고 윤보라양),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천안북일고 윤여범군)….
대전 대덕고 김지현양은 “만화 ‘봉신연의’와 ‘역전 시네마’, 일본 애니메이션 소설 ‘부기팝’ 등을 통해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상식을 배운다”고 말했다.
녹화가 시작되자 전교 1∼10등을 한다는 퀴즈 참가 학생들은 척척 문제를 맞추었다. 알고 보니 제작진은 녹화 3, 4일 전 대강의 출제범위를 학생들에게 e메일로 배포했다.
춘천고 주영준군의 아버지는 강원대 수리정보학부 교수, 대덕고 윤보라양의 아버지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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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요구하는 교양
현재 ‘장학퀴즈’는 수학능력시험 관련 지식과 환경·경제상식·과학·창의력·시사상식 등 전문분야 지식에 대한 문제를 50 대 50의 비율로 출제한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문학, 과학, 사회, 예능, 상식 등 5개 분야에 대한 문제가 동일 비율로 제시됐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MBC ‘장학퀴즈’ 조연출을 했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주철환 교수는 14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말했다.
“1980년대만 해도 학생 수가 적어 희소성이 있었고 학생들이 갖는 사회적 긍지와 낭만이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문제(Problem)가 문제(Question)로 출제되는 퀴즈 프로그램이 유익하다. 조선시대 언론 삼사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란 식의 단편암기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요즘 실업이 사회적 이슈라면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이나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가사의 옛날 가요를 접목하는 ‘지식의 보물찾기’가 필요하다.”
주 교수가 “장학퀴즈 질문을 한 개만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따라 3시간 만에 e메일로 보내온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것을 존중하는 풍조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이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형법상 이것은 사람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라고 정의됩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 생활의 목적으로 삼았던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명예)
MBC와 SK에서 입수한 1980년대 장학퀴즈 기출문제와 EBS를 통해 제공받은 최근 문제는 사뭇 다르다.
‘미국 사회에서 이 말은 굿 올드 데이즈(good old days)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용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의 문화유산으로 인식되는 이 용어는 전설적인 디스크자키 앨런 프리드가 만든 것으로 1950년대 초 10대들이 즐기던 음악이 30여년이 지난 지금 기성세대의 추억의 음악으로 활기를 띠게 됐습니다. 흔히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것의 왕이라고 불립니다.’(정답:로큰롤. 1981년 7월 방송)
‘다음에서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외래어는 무엇입니까. ①활자를 주조할 때 글자의 모양을 만드는 틀 ②수학용어로서 행렬 ③컴퓨터 입·출력 도선의 회로망 ④영화 속 배경이 되는 가상공간’ (정답:매트릭스. 2003년 8월 방송 예정)
반면 클래식 음악의 역사, 미술 사조, 철학 사상, 로마사, 한국 고전문학 등은 시대변화와 관계없이 학생들에게 꾸준히 요구되는 교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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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퀴즈 30년
장학퀴즈의 상품 변천사도 흥미롭다.
1970년대 스마트 학생복, 양장지, 고급 만년필, 탁상시계였던 상품은 1980년대 스마트 자전거, 학생용 가방, 체육복, 오디오 테이프로 바뀌었다. 1990년대 영어전자사전과 도서상품권을 거쳐 현재는 노트북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개인 휴대 단말기(PDA) 등이다.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 동안 진행을 맡았던 차인태씨는 15일 미국 출장 중 연결된 국제전화 통화에서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1970년대 자녀의 출연을 부탁하는 정·재계 권력층의 압력이 쇄도했다. 당시 중앙고에 다니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도 출연을 신청한 적이 있다. 명문 K여고 학생이 주 장원전에서 5명 중 4등을 해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상품으로 제공되던 쉐라톤워커힐호텔의 고급 케이크는 인기였지만 지방으로 돌아가는 학생이 크림이 상한 뒤에 먹었다가 배탈 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상품으로 대체됐다.”
1976년 장학퀴즈에 출연해 주 차석을 했던 행정자치부 김두관(金斗官) 장관은 15일 전화 통화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남해종합고교를 다니던 당시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옆집에서 장학퀴즈를 시청했다. 광부로 일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는 큰 형을 배웅하러 처음 상경했다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MBC를 찾아가 장학퀴즈에 출연했다. 독일 아우토반과 미국 메이저리그에 대한 문제를 풀었다. 서울 명문고 전교 1등 학생들 틈에서 시골 학교 학생이 전교 15등이라고 말했더니 차인태씨가 놀랐다. 권투를 좋아해 체육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또 놀랐다.”
장학퀴즈 출연자들의 친목 모임인 ‘수람회’의 주소록을 제공받아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출연한 회원 160명의 출신 대학교를 분석한 결과 서울대 81명, 고려대 20명, 연세대와 이화여대 각각 17명순으로 이들 학교 출신이 전체의 84%를 차지했다. 직업별로는 의사 21명, 언론인 15명, 법조인 9명, 교육자 7명 등이었다. 이 중에는 1980년대 후반 대학생 퀴즈 프로그램이었던 MBC ‘퀴즈 아카데미’의 7주 연속 우승팀 ‘여름사냥’의 송원섭씨(현 스포츠조선 기자)와 SBS 한수진 전 앵커도 있다.
15일 녹화가 끝난 뒤 출연 학생들은 인터넷에 친목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며 서로의 e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이번 일요일 오전 9시에도 어김없이 장학퀴즈 시그널 음악인 하이든 협주곡의 트럼펫소리가 팡파르처럼 울려 퍼질 것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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