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동화기기 전문업체 노틸러스효성(옛 효성컴퓨터와 효성데이타시스템의 합병회사)은 지난달 팀장 이상의 간부 50여명을 대상으로 인천 강화도 전등사에서 간부교육을 했다.
이 자리에서 회사측은 4월부터 진행했던 부하직원들의 첫 상향평가 결과를 본인에게 통보했다. 교육장소를 사찰로 정한 것은 평가 내용을 보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는 취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후배가 바라보는 나 사이엔 너무 큰 격차가 있었습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한동안 멍한 상태였습니다.”(A팀장)
후배를 평가하는 데만 익숙한 이들이 후배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고통이었다. 인사권자로서 권위를 포기하는 듯한 기분도 편치 않았다. 번민을 다스리는 데 참선은 효과가 있었을까.
조직에 속한 사람이라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조직의 평가다. 오죽하면 인사고과 철에만 실적이 반짝 오르며 상사와도 친해지는 ‘고과형 인간’이란 말이 나왔을까.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기업의 평가제도도 시대나 여건에 따라 변한다.
▽성과급제로, 다면평가로=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차입금으로 방만한 경영을 해 온 국내 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수익을 못 낸 기업은 곧장 퇴출됐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직 자체가 똑똑해져야 했다. 연공서열 인사로는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었고 기업들은 능력급제를 훌쩍 넘어 바로 성과급 연봉제를 도입했다.
평가 결과의 무게도 달라졌다. 과거 좋은 평가는 ‘조금 앞선 승진’을 뜻했다. 고과 결과에 따른 임금 차별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이제 뒤떨어진 평가 결과는 개인의 퇴출로 이어진다. 임금 차별도 몹시 커졌다.
상황이 바뀌면서 윗사람이 평가 결과를 ‘인비(人秘)’ 도장이 찍힌 봉투에 담아 인사부로 넘기는 기존 방식으로는 피평가자의 불만을 달랠 수 없게 됐다. 기업이 대거 다면평가를 도입한 것은 이 때문이다. 1인 평가의 편견과 오류를 줄이고 피평가자의 능력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 피평가자가 평가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취지.
그러나 다면평가솔루션 개발업체 제오스페이스(대표 이병두)의 진단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평소 일은 하지 말고 인기관리만 하란 말이냐?”
“평생 ‘사내(社內)정치’하면서 여기까지 온 나다. 갑자기 체질을 바꾸란 말이냐?”
이런 불만이 가감 없이 불거져 나온다는 것.
97년 다면평가를 도입한 정보기술(IT) 업체 B사에서는 평가 철이 되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회식이 잦아지고, 부하가 실수해도 상급자는 싱긋 웃는다. 이 회사 김모 이사는 “후배들에 대한 ‘로비 비용’이 평가를 잘 받아서 오르는 연봉보다 많을 때도 있다. 그래도 승진이 걸린 문제 아니냐”고 말했다.
▽평가의 진화=상당수 국내기업들이 다면평가를 하는 목적은 평가 결과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들은 ‘조직의 경쟁력 강화’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는 실적(result)과 역량(competency) 두 부문에 걸쳐 1년에 두 차례 다면평가를 실시한 뒤 30여 가지 항목으로 나눠 수치화해 기록하고 본인에게도 통보한다. 이 기록은 직원의 성향 능력 성과 성장계획, 이에 따른 연봉수준 등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다. 한국MS 인사부 임명선 부장은 “다면평가를 하는 것은 팀워크 커뮤니케이션 등을 중간 간부 중심으로 원활히 수행해 궁극적으로 MS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의 의미이지 ‘줄 세우기’가 아니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유지성 수석연구원은 “기업이 진화하면서 다면평가를 포함한 모든 평가 과정은 ‘서열화’에 머물지 않고 개개인의 능력과 성과 계발을 위한 ‘육성형 평가’로 발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아가 모든 종업원들이 기업의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도록 유도해 조직원의 행동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 평가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수석연구원은 “100% 옳은, 최선의 평가제도란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시대와 경제상황에 따른 적절한 평가제도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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