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인 괴테와 실러의 유적지로 알려진 바이마르는 고전주의의 도시다. 독일 튀링겐 주 일름 강변의 이 도시는 1998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됐고 1999년에는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아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됐다.
18세기 바이마르에서 일어난 일은 학문의 역사상 진귀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괴테와 실러, 작곡가 리스트, 철학자 니체 등 천재적 능력을 지닌 여러 개인들이 적당한 때에 한곳에 출현해 고대 이후 처음으로 그리스 고전주의를 철저히 해부했다.
마치 학문적인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처럼 폭발하듯 일어난 사유와 사상들은 모두 종이 위에 옮겨져 인쇄됐고 사회와 문화에 대한 끝없는 철학적 사유들이 다시 수백만 권의 책으로 형상화됐다. 그 덕분에 바이마르는 독일 정신문화의 중심이자 고전문학의 메카가 됐으며 바이마르의 이러한 ‘문화적 풍경’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바이마르의 건축물과 공원에 세워진 기념비는 선대의 정신적 유산에 육체적 형상을 부여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 독일 문화의 근원, 튀링겐
괴테는 1775년 바이마르 공화국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초대로 26세에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이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괴테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어디서든 괴테를 만날 수 있다.
베를린을 기점으로 괴테의 탄생지인 프랑크푸르트까지를 ‘괴테 가도’라고 부른다.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하는 옛 동독의 튀링겐 지방이 이 가도의 하이라이트다. 튀링겐은 ‘독일 문화의 근원’이다.
괴테는 바이마르의 재상으로 11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어느 날 도망치듯 이 도시를 떠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창작에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문화적 체험을 얻었고 예술가로서 생에 큰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이 여행 이후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됐다.
당시 바이마르 귀족사회는 여행에서 돌아온 괴테를 “살이 많이 쪘고 야만적으로 변했다”고 수군거리며 맞았다. 하지만 28세의 실러는 기대감을 갖고 괴테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외모 환경 등이 달랐던 괴테와 실러는 오랜 세월 친구로서 우정을 나눴다. 바이마르에는 이 두 천재들의 심상치 않은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도시의 중심 극장광장에는 국립극장이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실러의 ‘윌리엄 텔’이 처음 상연됐고 리스트, 슈만, 바그너도 활약한 이 극장은 몇 차례 소실돼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극장 앞에는 심각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괴테와 실러의 동상이 있다.
● 가는 곳마다 괴테의 자취
바로크 스타일의 괴테하우스는 괴테가 1782년부터 숨을 거둔 1832년까지 거주하던 장소로 아우구스트 대공이 선물했다. ‘파우스트’를 써냈던 서재와 침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1885년부터 박물관으로 바뀐 이곳의 고급스러운 가구와 집기들에서 당시 유복했던 괴테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괴테하우스가 이처럼 일반에 공개되기까지는 그의 손자인 발터 볼프강 폰 괴테의 공이 컸다. 그는 유서에서 당시의 ‘작센 대공국’을 그의 할아버지 괴테의 부동산 상속자로, ‘작센의 대공비’를 괴테의 문학작품 편지, 저서들을 포함한 장서의 상속자로 지정했다. 이 유서는 바이마르시의 문화사, 아니 독일의 문화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으며 ‘괴테 국립박물관’과 ‘괴테 문서실(1889년부터는 괴테-실러 문서실로 불리게 됨)’, ‘바이마르 괴테협회’가 마련될 실마리를 마련해 주었다.
괴테는 일름 강 건너편 공원 안쪽에 있는 괴테 산장에도 즐겨 머물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괴테의 오랜 연인 샬로테 폰 슈타인 부인의 집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실러가 1802년부터 1805년까지 살았던 실러하우스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처음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했을 때 괴테는 이 집을 알선해줬고 땔감과 마구를 마련해 이사를 도왔다. 괴테하우스에 비해선 비교적 검소하지만 분위기는 훨씬 밝은 편이고 빽빽이 서가를 메운 책들은 실러가 대단한 독서가였을을 알려준다.
그가 ‘윌리엄 텔’을 썼던 책상과 문구류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집과 연결된 박물관에도 그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돼 있다. 두 사람은 같이 마차 여행도 즐기고 괴테가 중병에 들었을 때는 실러가 매일 문병을 갔을 만큼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두 사람이 자주 들렀던 레스토랑, ‘가스트하우스 줌 바이센 슈반(Gasthaus zum weißen Schwan)’에는 당시의 메뉴가 남아 있어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묻힌 묘지도 이 도시에 있다.
괴테는 바이마르의 공직에 재직하는 동안 훼손된 건축물의 재건축 사업에 참여하는 등 도시 전체에 그의 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괴테 광장에 서서 도시를 둘러보고 괴테하우스에서 그의 친필 편지들을 읽어보고 괴테와 만났던 다른 이들의 유물을 통해 다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바이마르에선 어디를 가든 다른 어떤 천재들보다 대문호 괴테의 손을 잡고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여행정보▼
● 관람정보
괴테하우스는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 개관하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실러하우스는 매주 수∼월요일 오전 9시∼오후 5시 개관하고 휴관일은 화요일. 리스트하우스는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 오후 1시, 오후 2시∼ 오후 5시 개관하고 월요일은 휴관한다. 바이마르에 관한 일반 관광정보는 독일관광청(www.germany-tourism.de)과 독일문화원(02-754-9831 www.goethe.de/os/seo), 루프트한자 항공사(02-3420-0400 /www.lufthansa-korea.com )에서 얻을 수 있다.
● 기타정보
바이마르에서는 괴테와 실러 외에 다른 예술가들도 활동했다. 그 중 ‘헝가리 광시곡’을 작곡한 리스트의 경우 1842년에 바이마르 궁정 악사장이 되었고 1848∼1861년에는 바이마르의 알텐부르크에 머물렀다. 1889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가 살았던 집 역시 그대로 보존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리스트가 친필로 쓴 악보,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시기는 다르지만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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