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유전, 운명과 우연의 자연사'

  • 입력 2003년 7월 25일 17시 34분


◇유전, 운명과 우연의 자연사/제니퍼 애커먼 지음 진우기 옮김

/370쪽 1만3000원 양문

하얗게 서리 내린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꽃을 보며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고 미당 서정주는 말했다. 생명의 최소 단위는 세포다.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생명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수억년에 걸쳐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하여 살아남은 것들이다.

원시의 바다에서 단세포생물이 처음 출현한 그날부터 계보를 이어 내려오면서 세포는 점점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고단위의 생명체로 진화해왔다. 세포를 만들어내고 그 세포가 생존에 더욱 적합하도록 진화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바로 유전자다.

지금까지 유전자나 유전학에 대한 대중 과학서들이 대체로 ‘이기적 유전자’나 ‘이타적 유전자’라는 관점에서 자연현상을 풀어나갔다면 이 책은 통합적인 관점에서 거대한 생명의 바다를 조망하고 순례한다. 자연은 필연과 우연, 낭비와 절제, 변화와 정체, 이기성과 이타성같은 극단적 수단들을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사용하여 생명을 연속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에는 적과 친구가 정해져 있지 않다. 때로는 적이 나의 생존에 유익한 것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내가 적에게서 훔치기도 한다. 인간의 유전자 중 많은 부분이 바이러스 유전자에서 유래한다. 임신한 여인의 몸이 태아를 거부하지 않는 것도 인간의 유전자에 이러한 기능을 갖는 바이러스에서 온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유전자를 자르고 붙이는 기능을 필요로 하는데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유전자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처럼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수긍할 수 있다. 나의 밖에 있는 저 풀과 나무와 무수한 동물들이 하나로 묶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도 그들로부터 선물 받거나 얻어온 분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뇌세포에서 생식을 관장하는 물질은 효모(이스트)의 짝짓기를 유도하는 물질과 닮았다. 우리 몸의 골격 형성을 조절하는 혹스(Hox)유전자는 초파리의 골격 형성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같다. 인간의 혹스유전자를 초파리 유전자에 넣었더니 정상적인 초파리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먼 곳으로 여행할 때 시차를 느끼게 하는 유전자는 모든 고등생물에 있어서 유사하다.

이 책은 인간이 모든 생물종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그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인간이 이를 절감할 때 세상은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저자 애커먼은 여성의 눈, 어머니의 눈으로 생명현상의 기저에 놓인 유전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 시선은 따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전병을 앓고 있는 동생이 있었기에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애커먼이 발생과 유전학에 가졌던 관심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 저자 특유의 감수성과 따스함, 예술적 안목과 문학성까지 갖춘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나도선 울산대의대 생화학교실 교수·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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