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김춘추' 풍경

  • 입력 2003년 7월 25일 17시 44분


밤중에 어디로 가던 길일까? 복숭아나무 가지에 무거운 바랑 걸어놓고, 잠시 잠깐 ‘이 뭐꼬?’ 평생 화두(話頭)도 걸어놓고, 뽀얀 보름달 하나 과수원에 들어 장삼자락을 허리께 감아올린다. 고양이 발톱처럼 할퀴려 드는 엉겅퀴, 한삼넝쿨, 억새 잎을 피해 훤한 박덩이 두 개를 내어놓고 쭈그려 앉았다. ‘좔좔좔∼’ 읽던 먹물 경전 덮고 보니 도처가 해우소(解憂所)다. 하아, 달밤에 벌어진 비구니 스님의 ‘복숭아밭 방뇨사건’이 참으로 유쾌하다. 도시 같으면야 남의 집 담벼락에 붙다가 경범죄로 잡혀가기 알맞지만 저 도둑 오줌은 스님 시원해서 좋고, 과수는 거름돼서 좋다.

높은 데서 험한 밤길 다니시는 순라군(巡邏軍) 달님, 세상 후미진 그늘마다 일어나는 사건-도둑질과 패싸움과 겁간- 다 놔두고, 복숭아밭 난데없는 박덩이 보며 웃는 모습이 밉지 않다. 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며, 박 덩이 같은 엉덩이며, 엉덩이 같은 달덩이며 한결같이 둥글둥글한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것들이다. 저를 닮은 둥근 것들을 내려다보며 달달달, 웃는 달의 자의식은 얼마나 억압 없고, 자유로운가? 너무 웃다가 덜커덕 아래턱이 빠져 당분간 웃을 수 없더라도 초승달 눈매만으로 가늘게 눈웃음치며 또 어느 과수원에 빠뜨린 과수댁의 박덩이를 훔쳐보러 다니시는가?

세상이 너무 무섭고 으슥하지 않고 꼭 달빛에 반사된 저 박덩이만큼만 환하고 관능적이었으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여, 달빛에 하루쯤 모다 궁둥 까고 햇이엉 폭신한 지붕에 올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나 나누었으면. 찔레덤불, 탱자가시에 긁혀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둥실 떠오르는 참기름 바른 저 달.

달빛보다 문명의 빛이 더 밝은 도심, 어디 안심하고 박덩이 내놓을 밭두렁 하나 있는가 싶어 야속하다가도 정읍사 한 구절쯤이야 절로 나온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비구니 스님 과수원에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디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반칠환 시인

▼풍 경▼ 김춘추

달덩이같이뽀오얀비구니가

복숭아밭에서몰래소피를볼

때때마침지나가던둥근달이

털이보숭보숭한복숭아와박

덩이처럼잘익은엉덩이를보

고또보고웃다가기어이턱이

빠져목구멍목젖까지환하다

-시집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문학사상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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