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새벽산책' 배한봉

  • 입력 2003년 8월 1일 17시 21분


▼새벽산책 ▼

배한봉

물안개 속 버드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그 아래 골풀과 부들이 밀애를 즐기는지

수런수런 뒤섞여 흔들리고 있다

거기, 민달팽이 한 마리 뿔을 흔들며

은단 같은 이슬에 목을 축이고 있다

집 없어도 잠 잘 잤다는 것인지

느릿느릿 풀잎을 타고 내려와

돌 하나를 넘어간다

내 근심을 넘고 싱싱한 풀밭을 지나

조용히 아침을 불러오는

자그마한 저 우주

한 모금 이슬에 취한 생각의 뿔을 흔든다

오늘은 가시연꽃이 무더기로 필 것 같다

-'우포늪 왁새'(시와시학사)중

눈앞에 있는 사물의 현상을 선택적으로 끌어다 쓴 시의 이미지가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다. 담담하고 과장도 없다. 시인의 의식이 그나마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은 “내 근심을 넘고 싱싱한 풀밭을 지나 조용히 아침을 불러오는 자그마한 저 우주” 정도이다.

잠들지 못하고 새벽 늪을 거니는 그의 의식은 절제되었다. 건강함이 느껴진다. 그의 숨소리는 자연과 친화되며 시를 읽는 이의 귓전에 잔잔한 바람소리처럼 들려온다. 그곳에서 그의 눈에 띄는 사물들도 종(種)의 경계를 허물며 친화되고 있다. 골풀과 부들은 밀애를 즐기느라 수런수런 뒤섞여 흔들리고, 민달팽이는 이슬 한 방울에 목을 축이고 타 존재를 위한 삶의 예문처럼 움직인다. 이토록 의식이 자유로운 시인은, 알다시피 지금은 근심 중이다.

이른 새벽 편안한 잠자리에서 그의 몸을 일으키게 한 고뇌는, 최소한 그가 따라잡지 못할 세상의 속도감이나 질주에의 욕구는 아닌 듯하다. 그것이 무엇인들 또 어떠랴. 그의 시선과 움직임은 이미 뭔가의 껍질을 벗겨낸 자의 그것처럼 차분하고 서두르지 않는 것을. 조용한 움직임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 속에서 그도 골풀과 부들처럼, 민달팽이의 뿔처럼, 주체적으로 흔들리고(걷고) 있는 것을.

가시연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것의 사전적 의미에다 상상의 이미지를 더해 이 시를 읽는다. 가시연꽃은 가시 돋친 장미와도 다르고 가시 없는 수련과도 다르다. 정체되거나 흐름이 더딘 물로부터 솟아난 수많은 뻣센 가시가 예민한 신경처럼 곤두서다가 어떤 황홀한 생각에 이르면 소름이 돋듯 물 위로 마구 꽃이 피어나리라. 그 순간에는 세상이 몇 곱절 더 환해지고, 무의식까지도 의식 세계 안으로 넘쳐들어 눈뜨고도 보지 못했던 세상을 구석구석 볼 수 있으리라. “오늘은 가시연꽃이 무더기로 필 것 같다”고 예감한 이 시를 쓴 날의 그의 시간들도 그랬으면 한다.

조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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