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의 영원한 뮤즈 오드리 헵번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젊은 공주 역할을 할 인물을 물색하고 있었다. 공주는 왕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로마에서 미국인 신문기자와 함께 거리를 탐험하면서 사랑을 만들어가는 인물. 전형적인 미국식 해피엔딩이 아닌 유럽형 엔딩에 적합하며 미국식 악센트가 없고 공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고 모두가 믿을 만한 배우가 필요했다.
영국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테일러부터 프랑스 배우 콜레트 리페르까지 많은 여배우들이 고려 대상이 됐다. 마침내 오드리 헵번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나이는 스물둘, 키 5피트 5.5인치, 짙은 갈색머리, 마른 편이지만 매력적인 몸매, 재능있고 춤 솜씨는 최상, 목소리는 명쾌하고 지방색이 없는 악센트, 영국보다는 대륙적인 분위기….”
훗날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히트작인 ‘사브리나’를 감독한 빌리 와일더는 그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지적인 매력까지 있음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스키조프리니어(schizophrenia·정신분열증)의 철자를 쓸 수도 있어 보인다.”
오드리 헵번은 모계로 네덜란드의 남작 가문 출신이다. 출생지는 영국.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 있는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 밑에서 발레리나로 교육을 받았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경력만 봐서는 여느 할리우드 스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성공한 뒤에도 오만하지 않고 불행 속에서도 행복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특히 그녀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한 말년의 행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감을 성실히 수행했던 영화 속 앤 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다.
● 시작은 성 베드로 광장
영화가 시작되면 먼저 성 베드로 광장이 화면에 들어온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좌우 폭이 240m가량 되며 30만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성 베드로 성당 위 돔에서 촬영한 듯한 영화의 처음 장면은 로마의 웅장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이 거대한 유적의 도시에서 뭔가 근사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던져준다.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는 포로로마노다. 포로로마노는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중간에 있는 유적지로 고대 로마의 정치 상업 사법 행정의 중심지였다. 궁궐을 빠져나온 앤 공주는 의사의 처방대로 수면제를 주사 맞은 뒤 길거리 벤치에 쓰러져 잠이 들고 미국인 신문기자 조(그레고리 펙)는 도박을 끝내고 귀가하던 중 앤을 발견한다.
잠에 취한 앤을 조가 데려간 곳은 자신의 아파트로 허름한 뒷골목 거리인 마르크가 51번지에 있다. 지금은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로마에 와서 한번쯤 들러보는 관광 명소로 변했지만 영화를 찍을 당시만 해도 전형적인 시장 거리였다.
앤이 공주라는 것을 알고 취재 결심을 한 조에게서 돈을 꾼 앤은 트레비 분수 옆의 미장원에 들러 긴 머리를 과감히 자른다. 그리고 피아차 스파냐(스페인 광장)에서 젤라토를 먹는 깜찍한 모습이 나온다. 이 광장은 크지는 않지만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조는 이곳에서 우연인 것처럼 앤 공주에게 접근해 하루 동안의 데이트 신청을 한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의 시내 관광이 시작된다.
피아차 스파냐에서 테베레강으로 나 있는 콘도티 거리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가다. 콘도티가 86번지에는 앤과 조가 들른 그레코(Greco)카페가 있다. 1760년대 개점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그리스인이 시작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인인 괴테, 바이런, 키츠와 작곡가인 비제, 바그너, 리스트의 아지트였다.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로마 시내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다 ‘보카델라 베리타(진실의 입)’ 광장에 이른다. 이 광장에는 코스메딘의 산타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의 현관에 있는 하수관 덮개가 진실의 입이다. 석판에 강의 신의 얼굴을 조각한 것으로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졌다. 입 속에 손을 집어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목이 잘려 배우자의 진실을 시험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영화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속인 두 사람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긴장된 표정으로 ‘진실’을 시험하게 된다.
이곳을 벗어나 두 사람이 이동한 곳은 성 안젤로(천사)성 앞의 선상 댄스파티장. 낭만적인 음악에 맞춰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추는 연인의 이별을 앞둔 사랑이 화면에 잡힌다.
연인 뒤로 야경에 휩싸인 성채는 아드리아누스의 무덤으로 13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에는 감옥으로, 또는 교황의 은신처로 사용됐는데 오각형 모양이어서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1277년에는 바티칸 성당과 연결된 비밀 통로를 만들어 교황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곳을 통해 피신하기도 했다.
테라스에 오르면 성채 앞으로 흐르는 테베레강과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다리는 성 안젤로 교다. 영화 속의 앤과 조는 앤의 경호원들의 추적을 피해 강에 뛰어들었다 나와서 물에 젖은 채 이 다리 옆에서 첫 키스를 한다.
드디어 라스트 신. 영화 전반부에 환영 무도회가 열렸던 바르베리니 궁전이 다시 나온다. 앤 공주의 숙소이자, 주인공이 공주와 기자 신분으로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마페이 바르베리니가 교황 우르반 8세가 됐을 때 가족을 위해 지은 궁전이다. 영화에서 무도회장과 기자 회견장으로 쓰인 곳은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가 천장에 프레스코를 그린 그란 살로네(Gran Salone)다.
짙은 눈썹의 키 큰 미국인 그레고리 팩이 그란 살로네에서 밖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면서 영화는 끝난다. 꾸준히 카메라를 좇던 우리들의 로마 관광도 끝난 셈이다. ‘로마의 휴일’ 이후 어떤 영화도 로마를 그처럼 멋지게 포장해 세상에 내놓은 적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에 가면 누구든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로마까지 대한항공(02-2656-2000)이 주3회 운항한다. 소요시간은 11시간55분.
○여행정보
이탈리아에 관한 일반정보는 이탈리아
관광청(02-775-8806 /www.enit.or.kr)에서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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