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韓信)이 없는 한(漢)제국, 정도전이 없는 조선을 생각하기 힘들 듯, 스티브 발머 없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가 누구인가? 스위스 출신 고졸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을 중퇴한 뒤 P&G 제품담당 매니저를 거쳐 1980년 MS사에 입사해 사장을 거쳐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2000년 1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빌 게이츠에게서 MS사의 모든 운영권과 CEO 직위를 넘겨받은 것이다.
그런 스티브 발머를 집중 조명한 이 책의 원서 제목은 흥미롭게도 ‘Bad Boy Ballmer’다. ‘시대의 반항아 발머’ ‘악동 발머’ ‘나쁜 녀석 발머’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빌 게이츠가 MS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슬로건 주창자라면 발머는 ‘손에 피를 묻히는’ 해결사다.
’나쁜 녀석’ 발머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기업의 뒤통수를 치거나, MS사의 시장을 위협하는 상대를 군대식 전술로 무자비하게 초토화하기도 했다. 신제품 출시일을 사실상 조작해서 훨씬 일찍 발표하는 일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한때 파트너였던 IBM과 협상하면서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당한 일마저 있었다. “나에겐 적 아니면 아군뿐이다!”라는 발머의 외침에 그런 모습이 집약돼 있다.
“스티브 발머, 그를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난다”는 저자의 말대로 발머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인재 등용에서 탁월한 발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MS사가 기업공개를 실시한 1986년 이후 채용된 어느 직원의 말이다. “발머의 인터뷰는 정신감정을 해봐야 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죠. ‘왜 맨홀 뚜껑은 둥근가?’ ‘미국에 주유소가 몇 개인가?’ 등과 같은 질문을 하곤 했어요. 이는 단지 어떤 식으로 대답하는지 보기 위한 질문이었죠.”
그렇다면 발머 자신은 인사 문제에 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사람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 나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러고 나선 그들을 들들 볶아라.” “처음 3년 동안 나는 모든 지원자를 직접 인터뷰했어요. 내가 곧 인사부였고, 나를 거치지 않고는 채용될 수 없었죠. 똑똑하고 의욕 넘치는 인재를 뽑아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4년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처음 만난 이후 30년의 세월에 걸쳐 우정과 사업의 파트너십을 쌓아 온 발머는 게이츠의 분신으로도 일컬어진다. 자신들의 관계를 ‘결혼’으로까지 묘사한 이들을 저자는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심리학의 에고(ego·자아)와 이드(id·본능)로 파악한다. 게이츠가 MS사의 에고라면 발머는 이드라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과 궁합이 잘 맞는 책일까? MS사, 나아가 정보통신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볼 목적으로 전략적 독서 또는 실용적 독서를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의미의 시시콜콜함을 만끽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요컨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독서를 할 수도 있다. 문장의 걸음이 경쾌하고 발랄하며 재치도 만만치 않다.
빠르게 전개되는 수작 인물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경제경영서 번역에서 두각을 나타내 온 번역자의 솜씨 덕분이다. 물론 저자 프레드릭 맥스웰의 부지런한 발품이 각별하기도 하다. 그는 어린 시절 발머와 길거리농구를 함께 즐겼던 친구부터 시작해 발머와 사적, 공적으로 접촉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인터뷰했다. ‘MS사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통찰’이란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표정훈 출판칼럼니스트 bookman@empal.com
▼스티브 발머는 누구인가 ▼
1956 스위스계 고졸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1973 4.0점 만점으로 컨트리 데이 고교 졸업, 하버드대 진학
1974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첫 만남
1976 문예지 ‘하버드 애드버킷’ 발행자가 됨
1977 대학 졸업, P&G 식품사업부 입사
1979 P&G 퇴사,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입학
1980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28번째 사원으로 입사
1983 MS ‘윈도’ 마케팅전 대성공
1986 MS 나스닥 상장, 첫날 주가 25% 급등
1998 마이크로소프트 사장 취임
2000 마이크로소프트 CEO 취임
2003 현재 세계 4위 부자(개인재산 160억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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