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당신은 물건더미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곤 삶을 단순화하기로 결심할지도 모른다. 물건 창고를 텅 비우는 대신,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수집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리품처럼 끌어 모았던 값 비싼 물건들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독일 미래학자 군둘라 엥리슈는 저서 ‘잡노마드 사회(job nomaden)’에서 현대인을 ‘유목민(노마드·nomad)’으로 표현한다. 유목민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며 짐이 되는 것을 기꺼이 버린다. 그들은 ‘소유’보다 ‘경험’을 최고의 재산으로 여긴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를 부추겨 고가품을 구입하도록 만들었다. 시장은 부유층이나 유명인의 생활방식을 보여주면서 상품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쓰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이제 물건더미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더 많은 경험으로 삶을 풍족하게 하려는 ‘노블레스 노마드(noblesse nomad·귀족적 유목민)’들의 소비양식에 주목할 때다.》
●비움과 여행
중소기업체 사장 P씨(47·여)는 22일 오전 그녀의 사무실에서 말했다.
“지난달 20일부터 이달 18일까지 남편과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다녀왔어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대자연과 야생동물을 감상한 뒤 남아공 썬시티에서 수상 스포츠와 화려한 쇼를 즐겼죠. 일 관계로 알게 된 탄자니아 출신 사업가로부터 현지 가이드를 소개받아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답니다.”
1년에 2번 이상 남편과 해외여행을 하는 그녀는 인터넷을 통해 충분한 여행정보를 구할 수 있는데다 거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패키지여행을 거부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스페인에서 3주 동안 머물렀으며, 재작년에는 한 달 동안 인도를 다녀왔다. 여행은 최대한 안락하게. 항공기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로, 숙박은 최고급 호텔만 택한다.
이번 사파리 여행 경비는 3000만원. 아이를 낳지 않은 그녀는 남편과의 연간 여행경비가 대략 5000만원쯤 된다고 말했다. 중견 샐러리맨 연봉에 맞먹는 거액이다.
그러나 여행 경비를 제외한 이들의 연간 가계지출은 2000만원, 월평균 170만원 수준이다. 여행의 씀씀이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한 감마저 든다.
집안 살림에 대해 물어봤다.
“서초동의 57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방 4개 중 2개는 아예 비어있고요, 거실에는 소파와 43인치 프로젝션 텔레비전이 전부죠. 텅빈 갤러리 같다고 할까요. 안방에는 침대와 붙박이장, 서재에는 책상과 책장만이 있어요. 냉장고는 10년 됐고요.”
그녀는 중산층 여성들이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일본 식기세트 ‘노리다케’를 갖고 있지 않다. 입고 있던 블라우스는 백화점 가판대에서 8만원에 구입한 국내 브랜드 것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명품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어요. 물건으로 나를 과시하는 것은 왠지 품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그녀의 남편은 회사 사장인 아내를 위해 13년째 기꺼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일명 ‘트로피 허즈번드(Tropy Husband: 성공한 아내를 둔 남편)’이다. 그녀는 1주일에 한번씩 남편과 지르박춤을 함께 추며 키스한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중고 예찬
같은 날 시내 이탈리아 식당에서 만난 국내 대기업 과장 S씨(31).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MBA)출신으로 현재 ‘연봉 7000만원+α(알파)’를 받는다.
“회사 일 때문에 며칠 밤샘근무를 해야 할 것 같네요.”
미혼으로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의 손목에는 비싼 롤렉스나 카르티에 시계 대신 실용적인 태그호이어 시계가 달려 있다.
그는 얼마 전 인터넷 사이트를 부지런히 검색해 2만4000km를 주행한 투스카니 중고 승용차를 1200만원에 구입했다. 그가 입은 양복은 종종 수백만원짜리 조르지오 아르마니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압구정동 반맞춤집(기본 치수의 양복을 소비자 체형에 맞게 수선해주는 곳)에서 20만∼30만원에 산 것이다.
“탈수록, 입을수록 닳는 물건에 돈을 많이 들일 필요 있나요. 유행을 좇을 필요도 없고. 똑같은 효용을 주는 대체상품을 구하면 되죠. 품질에 신경을 쏟는 벨트와 지갑을 제외하고는 고가품은 거의 없어요. 대신 그 돈으로 운동이나 외식을 즐기죠.”
그는 강원도 원주의 휴양리조트 오크밸리에서 가족과 함께 골프를 하고 친구들과 압구정동 중식당 ‘동천홍’, 청담동 퓨전 일식당 ‘무비’, 한남동 이탈리아 식당 ‘라쿠치나’ 등에서 외식하는 것을 좋아한다.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의 ‘단순하게 살아라’,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 등의 책을 통해 바쁜 일상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는다.
1990년대 결성된 서울대 출신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 멤버였던 SK텔레콤 마케팅연구원 양지훈씨(32)는 2001년 결혼할 당시 신부에게 혼수를 장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10여년의 자취생활 동안 사용해온 가구가 있는데 굳이 불필요한 새것을 살 이유가 없잖아요.” 아내는 결국 냉장고만 사 왔다. 각각 대학교수인 양씨의 아버지와 장인도 이들의 군살 없는 살림을 축복해줬다.
“복잡한 물건으로 집안을 채우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라.”
나이 30세가 되던 해 ‘30대에 하고 싶은 일’로 스노보드, 웨이크보드(여름 수상 보드), 축구, 스윙댄스를 정한 양씨는 캐나다 휘슬리 스키장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아내와 3일내내 스노보드를 탔다. 최근에는 1주일에 한번씩 경기도 양평에서 웨이크보드를 즐긴다.
오페라의 유령, 캣츠 등 뮤지컬을 비롯해 보이즈투맨, 스팅 등의 팝공연도 ‘가장 좋은 좌석’에서 빼놓지 않고 본다. 한달에 2회 이상 사교모임에 참석해 사람들과 사귄다. 물건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지만 젊었을 때의 경험은 다시 되돌려 얻을 수 없지 않은가.
●자기계발
플레시먼 힐러드 코리아의 최원희씨(여·29)는 청담동 피부관리업체에서 12회에 75만원인 피부 재생관리를 받고 한달치가 7만원쯤 하는 여드름 치료제를 매일 복용한다. 또 양재동의 피트니스클럽 평생회원권을 이용해 1주에 3회 이상 운동을 한다.
지난해 말부터는 한달에 2번 동부이촌동의 요리 강사를 찾아가 가정요리를 배운다. 수강료는 1회에 4만5000원. 강남역 부근 영어학원에서 청취강좌를 듣는 데는 10만원이 든다.
최근 결혼기념일에는 제주도의 펜션에서 2박3일동안 머무르며 좋아하는 생선회를 실컷 먹는 것으로 남편과 서로의 선물을 대신했다. 그녀는 올해 일본과 홍콩을 여행했다. 현재 타고 있는 2000cc짜리 SM5 승용차는 차량 유지비가 많이 들어 조만간 1500cc 소형차로 바꿀 예정이다. 승용차로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존슨앤드존슨 메디컬㈜ 정희영 과장(여·30)은 역삼동 집 근처 피트니스클럽 이용비(월 10만원) 이외에 개인 트레이너 비용 30만원을 추가로 낸다. 보다 효과적으로 운동하기 위해서다. 석달에 30만원인 백화점 문화센터 요가 강좌에는 또래 여성들이 모여 명상과 스트레칭을 한다.
“내 인생의 주인인 나 자신에 대한 투자야말로 가장 실속 있고 행복한 지출이지요.”
미혼인 정씨는 승용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승용차를 유지하는데 신경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택시를 타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가 지수
병원전문 홍보대행사 닥터PR 대표 이병철씨(34)는 최근 결혼 7년째인 아내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아내에게 성형외과 병원의 10회 피부관리권(100만원)을 선물한 것이다. 이젠 선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진화한다.
5년 전 160만원에서 현재 350만원으로 월 가계 소비지출이 증가한 그에게 항목대로 비교분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생필품비를 제외하고 여행, 운동, 외식, 공연 관람 등 이른바 ‘여가상품’ 또는 ‘경험상품’에 대한 월평균 소비지출이 21만3333원에서 105만9833원으로 늘었다. 소비지출 중 차지하는 비율도 13.3%에서 30.3%로 무려 20%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1998년 20만원을 들여 연 1회 설악산 콘도를 이용했던 국내여행은 올해 연 2회 제주도 여행(100만원)으로, 주 1회 한식(1만원 상당)의 주말 외식은 2주 1회 외국음식(5만원 상당)으로 품목이 바뀌었다. 연 1회이던 공연 관람(4만원)은 연 2회 관람(30만원)으로 늘어났다. 돈 씀씀이의 증가만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더불어 늘었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노블레스 노마드' 란▼
▷유형의 물건을 소유하는 대신 무형의 경험을 수집하는 새로운 소비자층을 일컫는 신조어. 이들은 가구, 승용차 등 비싼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전리품 문화’를 거부한다. 대신 해외여행, 운동, 외식, 공연 관람 등 자신의 경험을 풍족하게 해주는 활동에 소비지출을 늘인다.
자신의 부를 물건에 투자하기보다 경험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풍요로움과 단순한 삶을 추구한다. 유형의 상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큰데 반해 무형의 서비스를 선호하는 이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어 치밀한 구매 계획을 세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존 켄츠 석좌교수는 ‘노블레스 노마드’와 비슷한 뜻으로 ‘(물건을) 벗어던지는 사람들(shedder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소비패턴 2題▼
△삼성경제硏 보고서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소비변동 원인 및 향후 전망’ 보고서에서 소득수준의 향상에 따라 소비의 고급화 등 소비행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가계의 소비지출 중 식료품비와 주거비를 합친 ‘필수적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29.7%로 1995년 32.7%보다 3%포인트 떨어진 반면 교통·통신비와 교양·오락비의 합계인 ‘선택적 소비’는 지난해 21.8%로 1995년 17.1%보다 4.7% 포인트 증가했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한 1990년대 중반 이후 가계 소비지출 중 서비스 관련 지출 증가율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2001년 서비스 관련 지출 증가율은 7.2%로 전체 가계 소비지출 증가율(4.3%)을 크게 웃돌았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서비스화 정도는 선진국에 비해 저조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중 서비스업 생산 비중은 2000년 52.9%로 미국(74.4%), 프랑스(74.1%)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고, 제조업 대국인 일본(66.8%)보다도 낮은 형편이다.
이 연구 보고서는 국내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서비스 산업이나 문화·관광·레포츠 관련 산업의 활성화가 절실하다고 요약했다.
△문광硏 설문
주 5일 근무제가 본격 도입되면 친구와의 교제, 휴식, 쇼핑 등의 여가활동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여행, 관광 등 ‘경험형’ 여가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최근 전국 성인 남녀 4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 5일 근무제 도입에 따른 관광 여행 변화 전망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꼽은 ‘현재의 여가활동’은 교제 및 만남(17.7%), 휴식(16.7%), 산책 및 행락(13.6%), 운동(9.0%)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주 5일 근무제 도입시 희망 여가활동’은 여행 및 관광(25.6%), 운동(12.8%), 관람 구경(10.5%)의 순으로 응답했다.
또 지금까지 평소의 여행에서는 자연 명승 및 경관 감상(21.2%), 유흥 오락(14.7%), 위락 및 휴양 관광(13.5%)을 즐겨 왔지만 주 5일 근무제 실시 후 희망하는 여행방식으로는 레포츠(22.0%), 위락 및 휴양 관광(19.1%), 자연 명승 및 경관 감상(16.5%) 순으로 꼽았다. 이중 레포츠는 현재 10.8%에서 22.0%로 선호도가 크게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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