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단풍'…타오르는 단풍 빛 사랑

  • 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55분


단풍

-이영광

산들도 제 고통을 치장한다

저 단풍 빛으로 내게 왔던 것

저 단풍 빛으로 날 살려내던 것

열려버린 마음을 얼마나

들키고 싶었던가

사랑의 벗은 몸에 둘러주고 싶었던가

불난 집처럼 불난 집처럼 끓어

마침내 잿더미로 멸한다 해도

-‘직선 위에서 떨다’(창작과비평사) 중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이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대상과 직면하게 되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런 대상은 대체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로 오는 것일까. 그 대상을 통해 얻는 것은 과연 잿더미의 황폐함뿐일까.

제 삶을, 사랑을, 고통을, 분노를, 슬픔을, 콤플렉스를, 관리(치장)하는 자들의 정신은 맑고 짱짱하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을 어둠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은유적으로 사고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대상과 마주 선다. 신중히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 안에 머물며 시적 형식을 갖는 언어는 단숨에 바위의 표면으로 흘러내려 버리지 않고 긴 세월 동안 바위를 통과한 빗물처럼 맑고 서늘하다.

산들도 제 고통을 치장한다. 산은 인간사의 확대된 모습이고 인간은 산의 축소된 모습이다. 그 산의 단풍 빛으로 그에게 왔던 것들과 그 산의 단풍 빛으로 그를 살려내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사랑, 연민, 자기애, 수많은 의문과 지적 욕망과 불분명함들…. 그것들을 수없이 반추하며 고통도 가을 산의 단풍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은밀하게 열려 버린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뜨거운 마음의 원인이 된 자에게 들키고 싶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사랑의 벗은 몸에 둘러주고’ 싶었던 것은, 맨살보다 보드랍고 체온보다 따뜻하지만 외부의 힘으로는 절대 벗겨낼 수 없는 사랑을 품은 마음이다. ‘고통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식이 바닥에 깔린, 다소 낭만적인 이 시를 읽으며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천진한 감성이 그리워진다.

‘불난 집처럼 불난 집처럼 끓어올라 마침내 잿더미’로 멸해 버린다 해도 단풍 빛으로 다가오는 대상이라면 어찌 인간의 힘으로 피해 갈 수 있겠는가.

조 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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