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기철, '사색의 다발'

  • 입력 2003년 9월 2일 18시 45분


흙탕물은 아무리 흐려도 수심 위에 저녁별을 띄우고

흙은 아무리 어두워도 제 속에 발 내린 풀뿌리를 밀어내지 않는다

벼랑 위의 풀뿌리는 제 스스로는 두려워 않는데

땅 위에 발 디딘 사람들만 그 높이를 두려워한다

즐거움은 쌓아둘 곳간이 없고 슬픔은 구름처럼 흘러갈 하늘이 없다

-시집 '유리의 나날'(문학과 지성사)중에서 부분 인용

어린 시절 장독대에 간장을 푸러 갔다가 까만 간장에 비친 푸른 하늘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군대 시절 침 발라 닦던 까만 구두코에 비친 영롱한 세상을 보며, 세상에 대한 적의와 수모를 달래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검거나 흐린 것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가?

나의 아픔과 근심 때문에 남을 밀어내지 않고, 바로 그곳에 남이 뿌리내리거나 발 뻗게 한 적이 있는가. 나의 상처와 수심이 세상에 보약이 된다면 저 성자의 길이 다만 이타적 희생만으로 그치겠는가? 무릇 세상을 밝히는 불은 그 자신부터 환한 법이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아침을 깊이 근심하는 이여, 오늘 하루쯤 내 상처의 옹이와 관솔에 불을 댕겨 세상을 비추고 싶지 아니한가? 길 없는 길이 어디 있으랴. 달아나지 않는 자에겐 벼랑도 길이 된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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