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성선, '고요하다'

  • 입력 2003년 9월 3일 18시 10분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세계사) 중에서

봄이 수런대고 여름이 떠들썩하다면 가을은 단연 적막과 고요의 계절이다. 시어 중 가을을 암시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지만 저 달빛의 배경은 가을밤이 분명하다. ‘사각-’ 벌레에게 잘못 물린 달이 미농지(美濃紙)처럼 오려질 듯하다.

가을은 침묵과 고요의 굉음(轟音)을 듣는 시기이다. 높은 하늘 깊은 밤, 나뭇잎 한 장 떨어지는 소리에도 귀가 머는 계절이건만 이 문명의 불빛엔 고요가 없다. 차 소리, 환풍기 소리, 취객 소리…. 유년의 황새, 덕새 날아와 이 소란스러운 도시를 떠메고 날아가 버렸으면….

달이 벌레에 물려 오도 가도 못한다. 분명 지구의 자전(自轉)에도 달의 공전(公轉)에도 영향이 있으리라. 아삭아삭 달 베어 먹는 소리, 올 추석 달은 저 벌레에게 달렸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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