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군 왜관읍에서 태어난 정씨는 고향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1970년대에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본래 판화작업에 몰두하다 한지와 먹 작업으로 전환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즉흥성이 없고 항상 거꾸로 해야 하는 판화작업에 회의가 들 무렵 자신의 작품에 호감을 가진 한 이탈리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서양 남자는 안 된다. 더군다나 종교까지 다른 것(남편은 유대교)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보수적인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단행하면서 그녀는 삶에서 큰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작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나란 무엇인가, 내 그림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들에 휘말리면서 색도 없애고 표현도 없애고 싶었다. 문득 한지에 먹과 붓을 들게 되면서 화면을 단순화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정 화백이 선택한 것은 한지 캔버스에 수평으로 계속 줄긋기 작업을 반복하는 일.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녀의 수많은 줄긋기는 묘한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 화백의 작업이 부드럽고 따뜻하다면 나무를 재료로 하는 남편 디카푸어씨의 작업은 단단하고 차갑다. 그는 소나무 판 위를 여러 번에 걸쳐 가볍게 파낸 후 화면을 기하학적인 사각 무늬로 분할한 뒤, 흰색에서 검정까지의 무채색만을 사용해 절제된 화면을 만든다.
아내와 남편은 각각 종이와 나무, 부드러운 동양화 붓과 날카로운 조각 칼, 투명한 먹과 불투명한 오일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재료를 쓰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형태와 색채로 동양과 서양의 정체성을 조화롭게 이뤄나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마치 그들의 생활이 그러하듯.
아내는 남편에 대해 “무엇보다 작업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를 보고 많이 배운다”고 했고 남편은 아내에 대해 “생각이 맑아서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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