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거창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는 학생들의 동아리. 일부를 제외하면 입학해서 처음으로 악기를 배운 생초보들이 대부분이다. 당돌하게도 대작인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D MINOR’에 도전중.
첫 연습부터 연주회까지 주어진 시간은 80여일. 70여명이 모여 연습하는 과정에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겪는 좌절과 성취, 사랑과 아픔, 음악과 사회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번 연주회로 첫 무대에 서는 김민경씨(수학교육학과 2학년)의 눈에 비친 ‘생초보들의 80일간의 드보르자크 만들기’ 이야기.》
●1악장 Allegro maestoso
정신없이 달려온 80여일. 오늘은 사실상 마지막 연습 날이다. 단원들의 얼굴에 허전함이 묻어난다. 지휘자가 단상 위로 올라와 지휘봉을 들었다.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바닥을 울린다. 먹구름 너머로 아련히 묻어나는 호른. 첼로와 비올라가 혼자인 것처럼 슬며시 올라탔다. 음악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출발하는 기차처럼 전진한다. 이제 바이올린이 올라탈 차례다.
연습은 기말고사가 끝난 6월말부터 시작됐다. 제2 바이올린 악보를 받는 순간 ‘헉’ 하고 가슴이 막혀왔다. 바이올린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띄엄띄엄 잠깐씩 배운 것이 고작이다.
수도 없는 콩나물 대가리, 거대한 산맥처럼 펼쳐진 교향곡.
방학 내내 하루 8시간씩 연습에 몰두해야 했다. 아침 일찍 나와 연습 좌석을 배치하고 연습하고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의무적인 뒤풀이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지만 그냥 자 본 적은 별로 없다. 불안감에 악기를 꺼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내일은 좀 나아질까.
연습이 강도를 더해가면서 생초보들은 몰래 훌쩍거렸다. 작년 말에 동아리에 들어와서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현정이도 자주 눈시울을 붉혔다. 전체의 음정과 리듬이 안 맞는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솔로가 많은 관악기들의 스트레스는 우리보다 더하다. 현악기야 한두 명이 실수해도 넘어갈 수 있지만 관악기의 실수는 음악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새벽에 서클실에 들렀다가 별명이 ‘고구마’인 남자 동기가 호른을 끌어안고 자는 것을 봤다. 주변에 침이 흥건한 걸 보니 밤새 연습을 한 모양이다. 무심코 쳐다본 악보에 ‘고구마 파이팅!’이라고 적혀 있었다.
●2악장 Poco adagio
터널을 지난 기차가 속도를 늦춘다.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울릴 때마다 보헤미안의 푸른 초원에 양떼들의 점이 찍힌다. 그 위를 나는 한 마리 청아한 오보에.
연습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함께 지내다보니 온갖 갈등과 대립이 벌어졌다.
첫 갈등은 곡목 선정에서부터 찾아왔다. 선배들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고 부른다.
연주회는 ‘보수’의 절대 목표다. 화려하고 멋진 곡을 통해 좋은 연주회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진보’는 허례와 형식을 버리고 실력에 맞는 연주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개 그렇듯이 ‘진보’가 소수이다 보니 연주회는 ‘보수’의 뜻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옷’을 정하고 ‘몸’을 맞추자면 무리가 따른다. 모자라는 실력은 땀과 눈물로 메울 수밖에 없다. 800만원이나 드는 경비를 마련하려 선배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단 한번의 연주회를 위해 허례가 심하다는 ‘진보’의 주장도 일리가 있긴 하다.
선후배간에도 묘한 분위기가 있다. 실력이 없거나 연주회에 무관심한 선배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지난번 음악캠프 때는 한 후배가 “누나는 연주도 안하는데 왜 왔어요?”라고 말했다가 난리가 났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빈정거림으로 들렸는지 그 선배는 짐을 싸고 가버렸고 뒤에 이를 무마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3악장 Vivace
기차가 갑자기 역을 떠난다. 첼로가 내리막길을 폭풍처럼 밀고 내려온다. 갈색 갈대 평원이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평원 곳곳에 떨어지는 천둥 같은 팀파니.
악장, 수석, 회장단의 잔소리가 강도를 더해갔다. 연습 한 달여가 지나자 단원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남들은 방학이라고 해외연수에, 학원에, 학과공부에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그 와중에도 짬짬이 학원을 다니다가 된통 혼났다. 팸플릿 사진 찍는 날 시간이 겹쳐 좀 늦었기 때문이다. 울어서 퉁퉁 부은 채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인데….
하도 부대끼다보니 사람들끼리 정이 들어 사랑이 싹튼다. 트럼펫 승호 선배는 얼마 전 무너졌다. 몇 달을 끙끙거리다가 말을 붙였는데 여지없는 퇴짜. 그날 엄청나게 술을 마시며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푸념했단다. 어째서 사랑의 작대기는 어긋나기만 하는 걸까.
연주회가 가까워지자 회장단이 밤을 새는 날도 잦아졌다. 경비, 대관, 객원 연락에서 뒤풀이 안주까지 모두 챙겨야 한다. 조그만 동아리 연주회 하나에 해야 할 일은 태산 같았다.
●4악장 Allegro
불쑥 경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기차 바퀴처럼 전진한다. 화로 속으로 마구 기름을 붓는 지휘자. 폭우가 쏟아지는 검은 하늘로 야간열차가 질주한다. 그 위를 번개처럼 작열하는 트럼펫과 팀파니.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완성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때론 감미로울 정도로 화음이 맞기도 한다. 관악기 연주자들의 입술이 터지고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턱에 검은 멍이 뚜렸해진 결과다.
생초보 현정이도 슬며시 미소짓는 순간이 많아졌다. 제대로 자기 차례에 나온 적이 없던 트롬본 태영 선배는 이제는 ‘프로’ 같은 모습이다. 가끔이지만.
누군가 그랬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어 음악이 있다고.
지휘봉이 정점을 향해 치솟았다. Molto maestoso. 일제히 비상하는 단원들. 플루트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영화처럼 지나간 두 달 반. 연습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데 한 선배가 지나가며 말했다.
“민경아, 정말 수고했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힘든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든다. 또다시 울고, 아프고, 힘들겠지만 지금 이 사람들과 80여일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후회할까?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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