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고치령]나그네 발길 잡는 단종의 숨결

  • 입력 2003년 9월 10일 14시 19분


들꽃과 숲이 어우러진 고치령 옛길. 소에게 먹일 꼴을 지고 가는 마을 노인.
들꽃과 숲이 어우러진 고치령 옛길. 소에게 먹일 꼴을 지고 가는 마을 노인.
이 땅에 이처럼 아름다운 길이 또 있을까. 고치령(고칫재) 고개를 넘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이 같은 경탄을 토해낼 듯하다. 한없이 투명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맑은 하늘,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 숲, 그 사이로 끊어질 듯 아련하게 이어지는 한 구비 옛길.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에서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로 이어지는 고치령길 22.5km는 우리 길이 가진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여준다. 이 길은 소박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고요하지만 외롭지 않다.

가파른 외길도, 험한 골짜기도 없는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끝없는 고요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치령을 넘는 7시간 동안 단 한 명의 동행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따금 좁은 비포장도로를 지나느라 심하게 요동치는 자동차가 곁을 스치겠지만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고요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안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찬란한 나뭇잎과 주저 없이 지저귀는 새들, 그리고 이 길에 쌓인 피맺힌 역사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길을 한없이 매력적으로 만든다.

고치령은 조선시대 계유정난 이후 영월에 유배된 소년왕 단종의 복위를 꿈꾼 이들이 넘나들던 길. 당대의 ‘혁명가’들은 단종을 지키려다 순흥에 유배된 그의 숙부 금성대군의 소식을 단종에게 전하기 위해 이 길에 숨어들었다. 복위운동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단종의 영은 태백산 신령이 되고,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으로 살아 두 산을 잇는 고갯마루 고치령을 지키고 있다.

완만한 오르막이 끝나는 고치령 정상에는 이들을 기리는 산령각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단산면 마락리에서 43년째 살고 있다는 정인흠씨(69)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산령각은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마락리 주민들은 지금도 매해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재를 올리며 두 분의 넋을 기린다”고 전했다. 고개가 끝나는 곳에는 이들이 몸을 피했던 피바위, 망을 보았다는 망바위가 서서 지난 역사를 묵묵히 전해준다. 길의 끝에서 멀지 않은 두렛골에는 금성대군을 모신 서낭당도 남아 있다.

■ 글·송화선 기자 / 사진·지재만 기자

◈ Tips

- 교통: 영춘에서 의풍리로 들어가는 마을버스가 영춘면 구 신협 앞에서 오후 1시30분과 5시30분, 하루 두 번 출발한다. 나오는 시간은 오후 3시, 7시.

- 숙박: 의풍리 담배가겟집(043-422-6309), 좌석리 고칫재 민박(054-638-4544)

- 볼거리: 고치령 산령각 터, 연화폭포, 망바위, 두렛골 금성대군 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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