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대하사극 ‘무인시대’(武人時代)에서는 요즘 최대 실력자인 문하시중 정중부의 ‘치사(致仕)논쟁’이 한창이다. ‘치사’란 신료가 나이 일흔이 되면 조정에서 물러나는 관례. 적대적 관계인 공예태후는 물론 ‘권력이란 부자(父子)간에도 나눠 갖지 못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아들 정균도 아버지 정중부에게 ‘치사’를 권유한다.
그러나 정중부는 교묘한 술수로 고려시대 판 ‘용퇴론’ 논쟁을 피해나간다. 중국 한(漢)나라 재상 공광(孔光)이 칠십이 돼 조정에서 물러나려 했을 때 황제가 ‘궤장’(팔을 바치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해 치사를 만류했던 고사를 떠올린 것. 정중부는 임금이 자신에게 ‘궤장’을 내리도록 압력을 넣어 정치수명 연장에 성공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신당 논의와 세대교체론으로 어수선한 요즘, KBS1 ‘무인시대’와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野人時代)’가 현실정치와 비교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1997년 ‘용의 눈물’과 2001년 ‘태조 왕건’도 단순한 사극에서 벗어나 대선을 염두에 둔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논평이나 토론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 야인시대의 부활
‘야인시대’는 안재모가 맡은 청년 김두한 때는 최고 52%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중장년 김두한(김영철) 이후 시청률이 다소 주춤했다. 그러나 9월말 종영을 앞두고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 정치주먹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며 KBS2 ‘여름향기’와 MBC ‘다모’ 등과의 치열한 월화드라마 경쟁에서도 선두를 뺏기지 않았다.
‘야인시대’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쟁 장면은 지난달 말 신당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당 당무위원회에서 부활했다. 당무위원들이 막말과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생생히 비춰졌고, “사람을 동원했다. 깡패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씨는 “폭력배가 직접 정치에 동원되는 것은 사라졌지만, 서로 몸싸움하고 욕설하는 정치 행태는 김두한이 국회에서 오물을 뿌려대던 시절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앞으로 드라마에서 그릴 4·19혁명 이후 장면도 이념대립과 사회집단 갈등이 현재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 무인시대의 세대교체
KBS1 ‘무인시대’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민우)과 경대승(박용우) 등 20대 신예 장군들의 대결로 15∼17%대에 머물던 시청률이 최근 20%대로 올랐다. 특히 ‘무인시대’는 경대승을 젊고 강력한 개혁 정치가로 그리고 있다.
‘무인시대’의 이녹영 책임PD는 “경대승은 무인이지만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등 폭력적인 무신 집권자들과 차별되는 젊은 이상주의적 개혁 정치가로 설정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대승을 개혁정치가로 미화하는 데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소 다른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고려사)는 “경대승은 왕조체제와 문신정치를 유지해 후세에 의해 ‘반역자’로 평가받지 않았으나 집권 4년만에 요절했을 뿐 ‘개혁 정책’을 편 사실은 없다”며 “드라마에서 경대승이 ‘도방’을 통해 개혁정치를 편다고 설정돼 있지만 ‘도방’은 권력유지를 위한 사병집단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녹영 PD는 “권력의 속성은 과거나 요즘이나 별 차이가 없으며 역사는 자꾸 되풀이 되는 것 같다”며 “사극은 현실정치와 끊임없이 교감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시청자들의 재미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무인시대' 명종役 김병세▼
“난세의 실력자들은 화려하지만 짧게 살고 갔지요. 그러나 ‘무인시대’에서 가장 오래 출연하는 배우는 접니다.”
KBS1 ‘무인시대’에서 ‘허수아비 왕’ 명종 역할을 하고 있는 탤런트 김병세(40). 그는 난세에 살아남는 처세술을 깨달은 듯 웃었다.
김병세는 1회에서 의종의 동생으로 사가(私家)에 머물던 모습으로 출연해 명종에 즉위한 후 최충헌에 의해 폐위될 때까지 무인시대 총 150회(내년 8월 종영) 중 130회 동안 출연한다. 그 앞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무인시대 실력자 이의방(서인석), 정중부(김흥기) 정균(이민우) 부자, 경대승(박용우), 이의민(이덕화) 등의 출연 기간은 각각 30∼60회에 불과하다.
“난세의 처세술요? 명종은 무엇보다 누가 실력자가 될지, 실력자를 어떻게 다뤄야할지를 빨리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JP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김병세는 “정균과 경대승은 모두 젊은 장군으로 세대교체를 주장하지만 정균이 오로지 권력 획득을 위해 훌륭한 인재들을 내친 반면 경대승은 민심을 받든 게 다르다”며 “그러나 아무리 쟁쟁한 권력자라고 해도 곧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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