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를 위해 이 화백이 서울을 찾았다. 60년대 말 세계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킨 일본의 '모노파(物派)' 운동을 주도한 그는 작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깊은 사유에서 우러나온 달변으로 철학자다운 풍모를 보여 주었다.
그는 '회고전'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평생 몰두하신 일관된 주제는 무엇입니까.
"관계지요. 아니, 연계 혹은 연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돌멩이 하나를 보면, 다른 돌이 연상되고 강이나 숲이 떠올려지고 달나라까지 상상합니다. 모든 것은 연관 속에 있습니다. 다만 작가는 그 속에 있는 것을 잠깐 빌려와 전혀 다른 공간에 어울리게 하는 것이지요. 이건 또 하나의 연관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관계라는 말을 쓰는 거지요."
-한 주제에 몰두하신 이유는.
"이 나라 저 나라 방랑하면서 소외감도 많이 겪었고 우리나라가 약한 시절엔 무시도 많이 당해 분노나 적개심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살아서 가능하면 남과 악수하며 살자고 생각했습니다. 미지의 사람들을 만나 연계를 맺고 싶은 생각으로 '만남'을 화두로 점점 영역을 넓혀갔고, 나중엔 그것이 하나의 이슈가 되었지요. 70년대 일본에선 내가 쓴 '만남'이란 말이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으니까."
-당시 선생님이 주도하신 '모노파' 운동과도 맥이 닿는군요.
"그렇지요. 근대라는 게 한 가지 생각으로 덮어 버리는 거였는데, 가능한 이것을 깨고 바깥 생각도 좀 받아들이자, 남하고 대화하는 쪽으로 가자, 이게 모노파 운동의 핵심입니다."
'모노파' 운동이란 나무 돌 점토 철판 등 소재들을 거의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접 제시해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 미술운동을 말한다.
-어떤 이즘(ism)에 빠져본 적은 없었나요.
"60년대 재일 한국인의 통일운동이나 군정반대운동 같은 데 열심이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잘 맞지 않습디다. 저는 되씹고 재해석하고 비켜서 보고 다시 생각하는 게 맞아요. 난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에요. 늘 절망하고 의심하면서 살았어요."
-작품에서 보이는 여유나 여백과는 좀 다르시네요.
"좀 모순 되지만, 가만히 보면 내 조각 작품이나 캔버스에서 보이는 여유는 푸짐하다든지, 열려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엄청난 긴장이 있어요. 큰 해방감 아래 얼어붙은 긴장. 그 이율배반, 난 그런 모순으로 평생을 살았어요. 나라나 민족과 같이 가기보다 혼자 이 나라 저 나라 뛰어 다니다보니, 어쩔 도리 없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죠. 나이가 들어도 훈련이 되어서 그런지 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이번 회고전은 평생 자기부정을 통해 치열한 예술세계를 만든 한 대가의 삶과 만나는 자리다.
"3년 전 독일 본 시립미술관에서 처음 열었는데 다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정리한다는 게 안 좋은 면도 있어요. 틀에 자꾸 가둘 수가 있거든. 자기 역사는 되도록 안 만드는 게 좋아요. 그래야 암시도 많고 폭도 생기고 수수께끼도 남지요."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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