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서도 최남단의 저구(저九)마을에 차가 닿았다. 시인 이진우(38)가 서 있었다. 3년 만의 만남이었다. “뭘 정류장까지 나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가 운영하는 민박 ‘석양이 아름다운 집’이 배경 화면처럼 빛나고 있었다.
“손님 오셨다.” 그의 외침에 아들 호윤(8), 딸 지윤(7)이 집안에서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아이고, 우리 깜둥이들.” 아이들을 덥석 안은 시인 역시 검게 탄 얼굴이었다. 앳된 모습의 부인이 아이들 뒤에서 맑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막걸리 잔을 놓고 평상에 마주앉아 옛날 얘기를 나눴다. 예전에 그는 잘나가는 출판사의 기획실장이었다. 왜 홀연히 바닷가 마을로 찾아왔을까.
“글 쓰고 일하면서, 가족을 위한 거다, 라고 생각했었지요. 컴퓨터 자판에 매여 있다 문득 둘러보니,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내 곁에 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정작 사랑하는 이들을 힘들게 한 거죠.”
올해 초 내놓은 시집 ‘내 마음의 오후’에는, 힘든 도회 생활, 낙향, 자연에 서서히 동화되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당신께 꿈을 드렸고 시간을 드렸고 자유를 드렸으며/ 가족을 맡겼지요/ (…)/ 일신상의 이유, 그 하나만으로 당신을 떠납니다/ 이렇게 당신을 떠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회사씨’ 중)
자신이 태어난 곳(통영)에서 멀지 않은 조부모의 고향에 찾아왔지만 마치 ‘외국 가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에서 자란 부인은 심야버스를 타고 오면서 울었다. 집을 민박할 수 있도록 고쳐 작은 수입원으로 삼았다. 텃밭을 갈아 반찬거리를 댔다.
“아버지, 숙제 다 했어요. 이제 놀아도 되죠?” 아이들이 다시 쪼르르 뛰어나왔다. 말하는 모양새가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온 가족과 함께 바닷가를 돌아보자고 했다. 막걸리 한 잔 들어간 남자들의 얼굴에만 석양이 졌다.
“도회에서 아이들 키우지 못해서들 안달인데, 걱정은 없나요?”
시인이 앞을 가리켰다.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다. 해안가와 언덕으로.
“언덕길은 제 할아버지가 넘던 길이죠. 해안 길은 새로 생긴 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산길로 다니라고 하죠. 훨씬 시간이 걸리지만 다람쥐와 새가 반기고 때로는 뱀도 지나갑니다. 아이들도 언젠가는 어떤 길로 갈지 고민할 거예요. 그때, 매일 다니던 이 산길처럼, 힘들어도 의미 있는 길을 택했으면 합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마을 안쪽의 명사해수욕장 모랫바닥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아빠의 얼굴을 모래 위에 그렸다.
“서툰 밭일로 몸이 욱신거려 잠이 안 올 때, 잠든 가족을 보고 있으면 문득 고독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시를 쓰거나 다른 글을 끼적거립니다. 글 쓰러 내려온 것은 아니니까요.”
새 시집에서 엿보이는 여유와 편안함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깨가 서 말’이란 가을 전어와 함께 평상에 저녁상이 차려졌다. 학교 얘기랑 마을 친구들 얘기랑 밥상에 둘러앉은 채 두런두런 이어지는 식구들의 대화는 마냥 평화롭고 푸근했다.
“가시 조심해라.” “그런데 아버지, 같은 척추동물인데 왜 전어는 다른 물고기에 비해 가시가 많죠? 골격이 다른가요?” “어, 그건 말이지….”
거제=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이진우 약력▼
△1965년 경남 통영 생
△고려대 철학과 졸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1994년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2003년 시집 ‘내 마음의 오후’
△장편소설 ‘오감도’(1993) ‘적들의 사회’(1994) ‘메멘토 모리’(2001) 발간
△시 전문사이트 ‘시인학교 (http://www.poetschool.net)’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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