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걸’은 남성관객들의 이런 판타지를 들쑤신다.
런던 교외에 사는 은행원 존(벤 채플랜)은 우연히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러시아인 신부감을 ‘주문’한다. 그가 내건 조건은 외모는 상관없으니 대화를 위한 기본적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그러나 공항에 내린 신부감 나디아(니콜 키드먼)는 ‘예스’란 말밖에 못하는 무지하게 섹시한 여성이다. 존은 나디아를 ‘반품’시키려 하고 나디아는 몸을 던져 존을 사랑의 포로로 만든다. 둘은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나디아의 생일날 사촌 오빠라는 유리(마티유 카소비츠)와 그의 무식한 친구 알렉세이(뱅상 카셀)가 들이닥친다.
이 영화는 코믹 드라마의 전개방식을 가진 쿨하고 유쾌한 영화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면, 니콜 키드먼과 같은 절세미인을 길들이고, 묶고, 때리고, 매몰차게 버리는 설정에 사디즘적 쾌락이 숨어있다. ‘니콜 키드먼 길들이기’는 이 영화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물화(物化)된 니콜 키드먼=나디아는 ‘몸’은 있되 ‘뇌’는 없다. 영국에 혈혈단신 도착한 나디아는 다짜고짜 존에게 결혼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며 육탄공세를 퍼붓는다.
니콜 키드먼이 보여주는 모습은 뭇 남성의 리비도를 자극한다. 예쁘면서도 남자를 밝힌다. 게다가 여우같지도 않다. 이것이 전작 ‘디 아워스’나 ‘디 아더스’에서 보여준 ‘예쁘지만 엽렵한’ 그녀의 모습과 다른 대목. 뒤집어 보면, 남성관객의 꿈의 실현을 위해 니콜 키드먼을 ‘바비인형’으로 물화시키는 서글픈 스타 시스템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못생기고 소심하고 승진에서도 누락되는 존에게 매력만점의 니콜 키드먼이 매달리다니. 망가지는 니콜 키드먼의 모습에서 관객은 정복의 쾌감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존은 평범한 남성들의 대리인인 셈이다.
카메라는 니콜 키드먼에 대한 관음증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호텔 방에 갇힌 나디아가 알렉세이에게 협박당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존의 모습은 니콜 키드먼을 은밀히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남성의 심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그러나 니콜 키드먼은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 나디아에 대한 관객의 은밀한 환상은 영화 중반 이후 무참히 깨진다. 그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존에게 던지는 한마디. “영어를 못한다고 하면 남자들이 혹하죠.”
존은 남성의 꿈을, 나디아는 예쁜 여성들의 냉소를 담아 말한다.
“널 모욕하고 싶단 말이야.”(존)
“도대체 내게 뭘 기대한 거죠?”(나디아)
▽영화 속 비밀=니콜 키드먼의 극중 이름인 ‘나디아’는 러시아어로 ‘희망’을 뜻한다. 나디아는 결국 이 가명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실명이 ‘소피아’(‘지혜’란 뜻)란 사실을 존에게 털어놓는다. 그녀가 영화 초반 남자들에게 헛된 ‘희망’을 던졌지만 결국 ‘지혜로운’ 여자로 돌아온다는 암시다. 10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