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이야기]“세살때 차이코프스키 알았죠”

  • 입력 2003년 10월 9일 17시 01분



모스크바 시내의 볼쇼이 모길체프스키 거리.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이지만 오후만 되면 평범한 3층짜리 벽돌건물 주변이 갑자기 붐비면서 활기가 돈다. 거리의 주인공들은 대여섯 살쯤 되는 꼬마들. 한 손은 악기를, 한 손은 엄마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모여든다.

이 건물은 모스크바 시(市)문화위원회 산하에 있는 제10 어린이음악학교, 통칭 베토벤음악학교라고 불리는 곳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러시아의 예술영재학교, 음악신동을 발굴해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천재 예술가로 키운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기자의 말에 알렉산드르 팔리친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취미 삼아 음악을 배우려고 온 평범한 아이들입니다. 물론 가끔씩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문 연주가를 양성하는 엘리트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루고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적 소양을 갖게 하는 ‘생활예능교육’의 현장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엄마 손 잡고 한손엔 악기

베토벤음악학교는 정규교육기관이 아니다. 교육청이 아닌 시 문화위원회 소속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이곳에 와서 음악수업을 받는다. 한국식으로 설명하면 음악 과외를 하는 학원쯤 된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예술교육을 사교육의 영역으로 미루지 않을뿐더러 정규교육기관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다양한 교육이 이뤄진다.

베토벤음악학교는 정규 학교처럼 8학년 과정을 갖추고 있다. 7살에 입학하지만 ‘조기교육’을 원하면 3살부터 예비과정에 다닐 수도 있다.

성악이나 악기 중 하나를 택해 ‘전공’을 정한다. 악기는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기타 아코디언 첼로 플루트와 러시아 전통 현악기인 발랄라이카 중 하나를 택한다. 수업은 일주일에 3, 4번씩 6∼8시간이 보통이지만 원하면 매일 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

7살짜리 소녀 예카테리나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9월 학기에 입학했다. 예카테리나의 엄마는 딸이 매일 음악수업을 받는 것은 벅차다고 생각해 일주일에 3번, 하루에 2시간씩만 보내기로 했다. 일반 학교의 숙제도 해야 하고 처음부터 음악수업이 너무 많으면 금세 지겨워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의 시간표는 이렇게 짜여졌다. 먼저 3, 4명이 같이하는 이론수업. 처음에는 리듬부터 익히고 악보 읽는 법을 배워나간다. 다음은 합창. 친구들과 함께 동요를 배우는 시간이다. 살짝 교실을 들여다봤더니 율동과 함께 ‘악어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수업은 악기 교습이다. 선생님과 일대일로 자세부터 차근차근 배운다. 저학년 수업은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너무 길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 악기 교습 말고도 모든 수업의 학생 수는 5명을 넘지 않는다. 학생 530명에 교사가 90명이나 된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예카테리나는 이제 음악학교 가는 날만 기다린다. 내년에는 수업 시간을 좀더 늘려볼까 생각 중이다. 학기가 끝나면 강당에서 연주발표회도 한다. 그때쯤이면 예카테리나도 서툴지만 바이올린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초·중등학생들은 악기나 미술을 배우기 위해 따로 학원에 다니거나 개인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다. 베토벤음악학교 같은 공공교육기관이 모스크바에만 135개가 있기 때문이다. 수업료는 한 달에 100루블(약 4000원). 무상교육이나 다름없다. 외국인 학생도 수업료는 같다. 물론 외국인 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배려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이해해야 수업을 따라 갈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는 다뤄"

러시아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마치고 음악학교나 미술학교에 들렀다 집에 가는 것이 보통이다. 덕분에 경제적 부담 없이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게 된다.

이런 예술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그러나 8학년까지 마치고 졸업장을 받으면 음악전문대 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자랑하는 우수한 연주가들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콘세르바토리야’라고 불리는 음악원이나 음대는 저마다 부속 음악학교를 갖고 있다. 이들 학교는 물론 정규교육기관이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영재들을 뽑아서 가르치는 곳이다.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음악원 부속학교나 그네신음대 부속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음악은 이미 취미가 아닌 삶의 가장 큰 부분이다.

베토벤음악학교에서도 가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이 눈에 띈다. 팔리친 교장은 “그런 학생을 발견하면 부모와 상의한 후 차이코프스키음악원 부속학교 같은 정규음악학교로 편입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준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의 음악적 수준을 높여줄 뿐 아니라 전문 연주가의 저변을 넓혀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마다 관객의 감수성과 높은 수준에 감동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베토벤음악학교를 둘러보니 이런 수준 높은 음악적 감수성과 이해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김기현 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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