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에 형성된 신화가 하나 있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신화가 그것이다. 이 신화가 글로벌경쟁 시대에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 글로벌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화를 뒤엎어버린 것이 현재 영국 버킹엄대의 부총장인 킬리 교수의 이 저서다.
그는 정부의 연구보조금이 부족하다고 돈타령하는 과학자들을 비판하다가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가 제기하는 물음은 이렇다. 왜 로마제국시대보다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에 과학기술이 더 발전했는가. 정부의 연구지원을 대폭 확대했던 시기에 영국이나 미국이 상대적으로 쇠퇴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지원이 빈약하기로 이름난 일본과 스위스의 번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의 저서 내용은 과학사이지만 이론서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돋보이고 믿음직스럽다. 쓰레기통에 과학적 진실이 있다고 믿는 유별난 자연과학자가 한글로 번역했으니까 번역판도 역시 믿음직하다.
한때는 의사로 활약하기도 했던 생화학자 킬리 교수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내용이 풍부하다. 그 대답은 두 가지이다. 기초과학을 육성한답시고 정부가 나설 경우 순전히 낭비일 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정부는 과학기술의 공급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대답이다. 낭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부 관료들은 시장에서 멀리 있기 때문에 어떤 과학기술이 필요한지 알 수가 없는 데다 정부지원은 정치적으로 배분되기 때문이다.
자유경제에서는 신기술은 물론 기초과학까지도 기업과 민간인들이 아주 효율적으로 개발하므로 정부 없이도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다. 기초과학은 공공재화이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공급될 수 없으므로 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말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초과학과 기술혁신을 진작시킨 것도 정부간섭이 아니라 자유시장이라는 것이다.
킬리 교수의 저서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헌법에까지 규정할 만큼(제127조 1항)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투자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 정부는 과학기술 개발에 대해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수많은 국공립 연구기관도 거느리고 있다. 정부지원에 대해 과학자들의 돈타령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이 따져봐야 할 물음이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정부의 과학기술 투자 때문이라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민간 기업들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한국의 과학기술개발과 관련된 수많은 통계와 사례가 이제는 과학기술 투자에도 자유시장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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