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그렇지만 책과의 만남도, 조우란 말이 실감날 때가 있다. 우연히 들어간 책방에서 그 못지않게 우연스레 집어든 책이 두고두고 잘 읽는 책이 되는 것이다. 최근 ‘외톨이 말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Lonely Wasp’도 내겐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몇 년 전 영국에 살 때 아이와 처음으로 책을 사러 갔다. 당시 두 돌을 조금 넘겼던 아이는 그때까지 감기치레가 심하기도 했지만 부지런하지 못한 노모를 둔 탓에 세상에 태어나 책방이란 곳에 가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동도서부로 가는 층계참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을 보자마자 꼭 움켜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도 첫눈에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책방에 들어오자마자 5초 만에 책을 산다는 게 걸려서 좀 뜸을 들이다 사갖고 들어왔는데, 이후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 식구 모두의 ‘후회 없는 선택’이 되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모두들 기피하는 말벌이 우연히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잠자리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 앞에서 두꺼비를 물리침으로써 그들의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겨먹은 바로 그 생태적 특성 때문에 왕따가 되었다가 또 그 점 때문에 친구들을 사귀고 칭찬도 듣게 되는 내용의 의미심장함도 그렇거니와, 이 책을 잊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말 하나하나에 담긴 생기발랄한 표현들과 싱싱하기 그지없는 그림들의 조화이다.
말벌의 줄무늬와 앵 하는 소리만 들어도 날아가거나 쏙 숨어버리기 바쁜 쥐며느리니 무당벌레, 그런 모습을 보며 풀이 죽을 대로 죽은 말벌의 축 처진 날개….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는 표정 속에 살아 숨쉬는 듯 그려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특징만 잡아 그린 의인화된 만화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사에 가까운 그림인데도 곤충들의 다리 끝이나 날개의 각도 등등 소소한 뒷마무리를 통해 이토록 많은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풀과 나무 바위와 연꽃은 또 얼마나 사실적이면서도 정감있게 그려져 있는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모사란 것에도 붓질의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그리는 사람의 주관과 입장이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실제 예라 할 만하다.
끝으로 한마디. 영어식 구문을 우리 어법에 맞게 펼쳐 보여주면서 의역을 한 역자의 노고도 물론 값지지만, 영어를 대충 아는 부모라면 원서를 직접 구해다 읽어줘도 좋겠단 느낌이 든다. 워낙 영문 텍스트 자체가 어른이 읽기에도 재미있고 리듬감이 있기 때문이다.
주미사 (동덕여대 강의전임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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