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2층 바닥.
위태롭게 매달린 한 소방관이 자신의 손을 힘겹게 끌어당기는 동료에게 “(너도 떨어질지 모르니까) 내 손을 놓으라!”고 안타깝게 외친다.
동료가 그의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하는 말. “You go! We go!(네가 가야, 우리도 간다!)”
(영화 ‘분노의 역류’ 중에서)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방서.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더러 폼도 나고 ‘불만 끄면 되지’라는 어린 생각은 첫날부터 여지없이 무너졌다.
맞교대로 이어지는 격일 근무, 눈 좀 붙일 만하면 울리는 출동 벨소리, 팽팽한 긴장감을 허탈감으로 바꿔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신고….
격무와 박봉에도 벨소리 하나에 뛰쳐나가는 파이어맨들의 이야기. 서울 종로소방서(서장 황순철)에서 보낸 소방서 체험 일주일.
●봉부터 타라
“제대로 하려면 봉부터 탈 줄 알아야지.”
출동시 2층에서 타고 내려오는 철봉. 영화 본 것이 있으니 그냥 타고 내려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봉이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데다 팔에 힘이 없으면 그냥 7∼8m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단으로 내려오면 늦어.”
요령을 설명해 주던 한 소방관은 “출동 상황에서 당신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봉을 못 타면 따라다닐 수 없다”고 냉정히 말했다.
몇 번을 연습하는데 갑자기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구조 출동이다!
첫 출동부터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잽싸게 구조 버스에 올라탔다.(다행히 내려와 있을 때 벨이 울렸다)
순박하고 어눌하게 얘기도 잘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좀 전과는 다르다. 사정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구조벨트를 차고 전기톱과 에어백 등 각종 장비를 준비하는 모습이 마치 전시 상황 같다.
관내 공사장에서 철근 구조물이 무너져 사람이 깔렸다는 신고. 다행히 현장에 가 보니 철근 구조물이 무너진 것은 아니고 세워놓았던 철근 한 개가 쓰러져 한 사람이 다친 정도다.
대개 신고 내용은 실제보다 부풀려지게 된다는 설명. 하지만 신고 시점에는 현장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정도에도 지휘차, 구급차, 구조차, 펌프차(물을 펌핑하는 차) 등 차량 5, 6대와 20여명이 출동한다. 이게 한 팀이다.
돌아오는 길은 여유가 있다. 저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잡담을 늘어놓는다.
“화재는 이틀에 한 번꼴이고, 구조는 하루에 2∼4건 정도죠. 구급은 수시로 있고….”
소방서라면 불 끄는 일이 대부분인 줄 알았는데 실제는 구급과 구조가 더 많단다.
체험 3일 만에 인사동 신축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토해내 듯 뿜어 나오는 시커먼 연기.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이라 모두들 재빨리 호스를 이고 현장으로 뛴다.
주민들은 구경이라도 난 듯 몰려들지만 언제 기름이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다.
한 소방대원이 연기를 헤치고 밖으로 나오며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자 물과 폼소 화학제(소화약제의 일종. 기름 화재의 경우 주로 사용한다)를 쏟아 붓는다.
일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근무 형태다.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4시간 근무를 한 뒤 그날 하루를 쉰다. 밤을 새워야하니 쉬는 날은 오후 늦게까지 잘 수밖에 없다. 휴가를 제외하면 일년 내내 이런 생활의 반복이다.
부서 회식도 꼭 해야 할 경우 퇴근하는 아침에 한다는 말.
주 5일제, 연휴, 자기 개발 같은 단어는 남의 일이다.
●죄보다 사람이 더 밉다
막 현장에서 돌아왔는데 바로 다시 벨이 울렸다. 허겁지겁 올라탔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여유롭다.
“뭡니까?”
“고양이 구조 출동이요.”
“고양이요? 그런 것도 출동해요?”
동물 중에서는 개와 고양이 출동이 가장 많다. 대부분 집 없는 개나 도둑고양이를 잡아 달라는 주문이다.
개는 광견병 등의 위험이 있어 그래도 이해하지만 고양이 신고는 좀 심하다는 말. 이번에도 자기 집 담 틈에 고양이 새끼가 울고 있으니 잡아가 달라는 신고였다.
“사무실에 비둘기가 들어왔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있었죠. 어른이 그거하나 처리하지 못하나 씁쓸한 생각도 들지만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안 나갈 수 도 없으니….”
이전에는 실종신고가 들어와서 출동해보니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50대 아저씨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찾아 달라고 떼를 쓴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지갑이 구조대상이 됐을까?
사람 다치는 일이야 당연히 출동해야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한참 졸고 있는데 떨어진 구급 출동.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질풍처럼 달려 가보니 룸살롱에서 술 마시던 40대 초반의 남자가 이마가 약간 찢어진 채 멀쩡히 앉아 있었다.
“왔으니 대일밴드 하나 주고 가요.”
목구멍까지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커트 러셀이 멋진 소방관으로 나온 영화 제목이 왜 ‘분노의 역류’인지 알 것 같다.
죄가 왜 밉나? 사람이 더 밉지.
허망하게 돌아오는 길에 아줌마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다시 왔다. 50대로 보이는 부부가 계동 뒷골목에서 술을 마시다가 부인이 갑자기 쓰러졌단다.
그나마 출동다운 출동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취한 남편이 아내를 보고 실실 웃으며 헛소리를 한다. “야! 너 죽으러 간다.”
‘아이고∼ 저것도 남편이라고∼.’
짐작컨대 같이 술 마시다가 때린 모양이다. 화재신고는 119! 범죄 신고는 112!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우리나라 행정이 대개 책임을 아래로 전가시키거나 턱도 없는 주문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 충분한 조직이 거의 없지만 소방서는 그중에서도 심각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야.”
구마다 소방서가 생겨나는데 정원은 서울시 정원에 묶여서 늘지 못한다는 말. 새 소방서가 생기면 각 소방서에서 몇 명씩 빼서 충원하는 식이다. 당연히 기존 소방서는 계속해서 인원이 줄 수밖에 없다. 비인간적인 격일 근무가 지속되는 이유다.
출동하는 차량마다 빈자리가 절반 이상이다.
종로소방서의 경우 7, 8년 전보다 절반가량 인원이 줄었다.
현실에 안 맞는 소방법도 성토의 대상이다.
“소방법이 미비할 때 만들어진 건물에 새 소방법을 아무리 들이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
뜯어내고 다시 짓게 할 수도, 그렇다고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도 없는 현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터지면 언제나 언론과 윗선에서 “그동안 뭐했느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식으로 몰아치지만 안타깝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화재가 발생하자마자 원인과 피해규모를 묻는 습관도 답답한 일 중의 하나다.
대형 화재의 경우 채 불도 끄기 전에 윗선과 언론은 원인과 피해액을 묻는다.
‘불도 안 껐는데?’
보고를 해야 하는 간부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답답하다고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대충 평수와 건물 연수 등을 추산해 피해액을 보고하지만 내부 기자재나 물건 값은 알 수가 없어 정확할 수가 없다.
소방관에게 화상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하지만 3개월 이상 치료시에는 본인이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문제는 큰 화상은 대부분 치료기간이 3개월을 넘긴다는 점.
더욱이 공무상 재해(공상)로 처리할 경우 간부들에게 현장 관리의 책임이 돌아가기 때문에 드러내고 말하기도 어렵다.
“공상 기간을 넘겨서 아직도 자기 돈 내고 치료받는 친구들이 많아…규정된 치료 항목이 아니거나 약간 좋은 약을 썼다고 안 되기도 하고…그래도 벨만 울리면 뛰쳐나가는 걸 보면 천직인가 보지? 하하하.”
남의 불은 끄면서 자기 발등의 불은 못 끄는 ‘순박한’ 사람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랬다던가?
‘선정(善政)이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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