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권력이 움직인다]<5>대구사회연구소

  • 입력 2003년 10월 26일 17시 14분


대구사회연구소는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을 모토로 내건 대구 경북지역 진보적 지식인들의 모임이다. 1992년부터 지역사회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정책대안을 제시해온 이들은 ‘지방분권’의 공론화를 주도해온 지식인 그룹으로 평가된다. 특히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요직에 연구소 회원들이 들어감으로써 ‘지방의 실세 브레인그룹’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역지식인 선언=“우리나라의 서울은 지방의 거의 모든 자원을 집어삼키고 있는 거대한 블랙홀이다. 대한민국이 ‘서울공화국’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방에서 어찌 인간다운 삶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001년 9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지역분권’을 요구하는 이른바 ‘전국지역지식인 선언’ 선포식이 열렸다. 이날 선언문에는 총 2757명의 지식인들이 서명했다. 지방 문제에 관한 전례 없는 지식인들의 집단의사 표명이었던 이 선언을 이끌어 낸 것은 부산경남지역사회연구센터, 전남사회연구회, 호남사회연구회 등 지역지식인 단체들이었고, 그 중심에 대구사회연구소가 있었다.

군사독재가 한창이던 85년 민주화 실현에 뜻을 같이하는 일군의 대구지역 학자들이 ‘지방사회연구회’를 창립했다. 분과별 연구 활동을 해 오던 이들은 ‘사회구성체론’ 등 당시 진보적 사회이론들을 함께 연구했다.

그러다가 이 연구회가 92년 대구사회연구소(대사연)로 확대 개편되면서 변화가 왔다. 2000∼2003년 9월 경북대 김형기 교수(경제학)가 소장을 맡으면서 대사연은 ‘지역연구소’의 특성을 살려 ‘분권과 혁신’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현 소장인 경북대 김규원 교수(사회학)는 “지방분권이 이뤄져야 하지만 그 전에 분권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시스템이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장주의 연구=대사연이 초기에 주력했던 것은 지역 실태조사였다. 그 결과물은 ‘지역 환경오염에 대한 주민의식 조사’(1992), ‘대구지역 빈민의 생활실태와 빈곤정책 연구’(1994) 등으로 나타났다. 92∼98년 월간 ‘대구 경북 지역동향’을 통권 73호까지 발간하며 지역사회의 동향을 전했다. 이 월간지는 지금도 웹진(webzine.tiss.re.kr) 형식으로 계속 발간되고 있다.

실제적인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99년부터는 지방분권과 21세기 발전모델을 모색하는 각종 정책토론회를 개최해 왔다.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을 지역주민에게 확산하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시민대토론회도 열었다. 특히 94년 ‘전환기, 대구 경북의 선택’을 주제로 한 토론회는 방청객 2200여명, 토론 20여시간, 방영시간(대구 MBC) 540분 등 지역문제 토론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우며 대중적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대사연의 관점은 ‘지역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연구소는 지역감정, 선비정신 등 대구 경북 지역인들의 의식을 규정짓는 특수한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뤘다. 동시에 지방자치제도가 발달한 선진국들의 사례를 통해 지역혁신 방안을 연구했다. 그 성과는 ‘자치시대 대구 경북의 비전’(1996), ‘지방분권 정책 대안’(2002) 등 10여권의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사회운동론을 전공한 조대엽 교수(고려대·사회학)는 “중앙 집중화가 한국사회의 주요 문제라는 데는 다들 공감했지만 누구도 선뜻 해결의 주체로 나서지 못했다”며 “대사연이 최근 10여년간 학계와 사회에 이바지한 가장 큰 공헌은 ‘지방분권의 공론화’였다”고 평가했다.

▽정책 제시와 시민운동의 병립=대사연의 핵심 멤버들은 2002년 4월 ‘지방분권 국민운동 대구경북본부’를 창립했다. 이어 부산, 광주 전남, 대전 충남 등 각 지역에 ‘지방분권 국민운동 지역본부’가 창립됐다. 현재 지역조직들을 묶은 전국조직인 ‘지방분권 국민운동 본부’의 의장은 김형기 교수가 맡고 있다.

지방분권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정부는 현재 지방분권법안을 만들어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 국민운동’은 보다 구체적인 법안을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이 법안에는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제 폐지, 주민소환제 실시, 지방소득세와 지방소비세 도입을 통한 재정 분권의 실현 등을 명시해 정부 법안에 현실성을 더하고 있다.

대사연에서 ‘지방분권 국민운동 본부’로 활동의 중심을 옮긴 김형기 교수는 “대사연은 연구를 통해 정책을 제시할 것이고, 지방분권 국민운동은 실천 중심의 활동을 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로부터 시민운동으로 확산해 나가되 역할분담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18일 경주 코오롱호텔에서 열린 ‘지방분권시대 문화분권 정책을 위한 토론회’에 대구사회연구소의 사람들이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경북대 이철우(지리학) 김형기(전 소장·경제학) 김규원(소장·사회학), 영남대 정지창(독문학), 안동대 임재해 교수(민속학), 허노목 변호사(부소장). 뒷줄 왼쪽부터 이상율 사무국장, 정태임 간사, 이창용 지방분권국민운동 공동집행위원장, 영남대 윤대식(부소장·도시계획학), 경일대 이종열 교수(행정학), 이균옥 책임연구위원(국문학), 권우현 선임연구위원(경제학), 우경혜 간사, 윤종만 지방분권국민운동 사무국장. -경주=김형찬기자

대구=김형찬기자 khc@donga.com

▼'대사연'은 盧정부의 인력풀? ▼

‘대구사회연구소(대사연)’가 세인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말 발족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명단이 발표됐을 때였다. 사회문화여성 분과위원장 권기홍(영남대·경제학), 경제1분과위 간사 이정우(경북대·경제학), 국민참여센터 본부장 이종오 교수(계명대·사회학) 등이 모두 대사연의 멤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새 정부 출범 후 노동부 장관에 권기홍, 청와대 정책실장에 이정우,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윤덕홍 교수(전 대구대 총장)가 중용됐고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 이종오(위원장), 주보돈 교수(미래전략분과 위원·경북대·역사학) 등이 참여하면서 대사연과 현 정부의 관계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대사연 사람들은 세간의 이런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김형기 교수는 “현 정부에 들어간 사람들은 개별적인 관계 때문이지 연구소 단위의 참여는 아니다”고 일축한다.

1985년 ‘지방사회연구회’로 출범할 당시 이 모임은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이론을 연구하는 지식인들의 스터디그룹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지역 특성상 이들의 활동은 진보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인식됐다. 그 뒤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보다 지역사회 발전에 관한 연구를 하며 정책대안을 만들어 보자는 김형기 교수의 제안에 경북대 주보돈, 계명대 이윤갑 신현직, 영남대 배용순 권기홍 교수 등 약 30명의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동참했다. 1992년 대사연으로 확대 개편될 때는 허노목(변호사), 김병준(의사), 김영주씨(회계사) 등 학계 외부 인사들도 참여했다. 차츰 활동목표를 ‘분권과 혁신’으로 집중해 가면서 오히려 일부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이념적 성향이 모호하게 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연구를 묵묵히 수행해 왔다.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빠듯한 살림이지만 6개 연구부와 4개의 센터에는 석사급 이상의 연구원과 박사급 이상의 연구위원 등 2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상근자는 4명에 불과하지만 200여 명의 연구 인력은 모두 한 개 이상의 연구부 또는 센터에 소속돼 활동하며 이 지역의 탄탄한 지식인 인력풀을 형성하고 있다. 이균옥 책임연구위원(국문학)은 “회원들 간의 두터운 믿음에서 조직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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