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근에는 일본기원이 있어 TV나 잡지를 통해 낯익은 프로기사들도 길거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곳이다. 이 바둑용품점은 호쾌하게 반상의 중앙을 경영하는 ‘우주류’로 많은 바둑 팬을 확보하고 있는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 자주 찾는 매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갑자기 어린이 손님이 늘어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상점을 운영하는 하치야 다쿠지(65)는 “어린이들 사이에 다시 바둑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히카루의 바둑’이란 장편 만화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히카루의 바둑’은 한국에서도 ‘고스트 바둑왕’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바둑만화. 바둑을 전혀 모르는 초등학생 히카루가 어느 날 창고에서 낡은 바둑판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순간 바둑판 안에 몇백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한 천재기사의 혼이 히카루의 몸속으로 들어온다.
히카루는 영혼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점차 바둑의 세계에 빠져들고 속속 등장하는 라이벌 기사들과 자웅을 겨룬다. 중학생으로서 프로기사가 되는 후반부에 이르면 한국 중국 일본을 오가는 ‘바둑 삼국지’로 이어진다.
바둑을 모르는 어린이나 어른들도 쉽게 스토리에 빠져들 만큼 재미있다. 이 장편 만화는 1999년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시작해 올해 9월 23권으로 완간됐다. 그동안 TV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다.
바둑용품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은 역시 만화 주인공 ‘히카루’의 캐릭터를 등장시킨 ‘히카루 세트’다. 바둑판과 바둑알, 통을 묶어 1만엔(약 10만원). 한 바둑용품회사가 만화작가에게 3%의 로열티를 주고 캐릭터를 등장시킨 브랜드를 만든 게 멋지게 성공했다.
“작년 여름 소학교(초등학교에 해당) 6학년생 아들이 갑자기 바둑판을 사달라고 해 어리둥절했습니다.”
도쿄에 근무하는 회사원 요시카와 가즈히로(41)는 아들 도모시(12)와 주말이면 수담을 나누는 재미에 빠져 있다.
“아들이 바둑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히카루의 바둑’ 때문이란 것을 알고 ‘대체 뭐기에’ 하고 저도 읽어봤습니다. 바둑판을 사준 뒤 저도 바둑팬이 되고 말았지요.”
도모시군은 올해 중학교에 진학해 학교 공부에 바쁘지만 가끔 시간을 내 일본기원 바둑교실을 찾아가 실력을 쌓고 있다.
도모시군의 어머니(36)는 “바둑을 배우고 나더니 아들이 부쩍 의젓해졌다”고 좋아한다. 워낙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만화가 범람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만화하면 비교육적’이란 고정 관념이 있었다. 또 바둑에 아이가 너무 깊게 빠져들지나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의젓하게 남편과 마주 앉아 수담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 걱정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 여가 시간을 보내는 즐거운 게임이면서도 침착하게 수의 변화를 읽어내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집중력 강화 효과도 얻는다고 믿게 됐다.
사이버 공간에서 잔인한 승부를 겨루는 인터넷 게임이나 PC게임 등과는 달리 바둑은 깨끗한 승부라고 강조하는 그녀는 어느새 바둑 예찬론자가 돼 있었다.
만화 ‘히카루의 바둑’으로 불붙은 일본의 바둑 붐은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소년소녀 ‘명인’ 바둑대회 참가자 수의 증가세를 보면 짐작이 간다. 2001년에는 2300명에 불과했던 어린이 참가자가 지난해 3500명으로 늘었고 올해엔 6500명이나 됐다. 겨우 2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바둑 붐으로 프로기전도 활성화되면서 2001년까지 8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기원은 2002년 4000만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일본기원의 한 관계자는 “이 정도로 만화의 힘을 실감한 적이 없다”며 즐거워했다. 한국이나 중국의 급성장세에 밀렸던 일본 바둑이 이번 어린이 바둑 붐을 계기로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바둑을 두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만 믿고 무조건 자녀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부모도 종종 있다.
그러나 강제로 시키는 것은 금세 싫증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히카루의 바둑’이라는 만화는 아이에게 바둑을 강요하지 않고도 평생 취미 삼아 익힐 수 있게 하는 교육서의 역할을 일본에서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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