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국내체류 15년째 맞는 스티븐 캐프너씨

  • 입력 2003년 11월 2일 18시 03분


태권도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근현대소설로 국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스티븐 캐프너가 “진짜 태권도의 묘미는 겨루기에 있다”며 선보이는 발차기에서 고수의 힘이 묻어난다. 그는 “아직 장가를 못 갔다”면서 나이만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전영한기자
태권도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근현대소설로 국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스티븐 캐프너가 “진짜 태권도의 묘미는 겨루기에 있다”며 선보이는 발차기에서 고수의 힘이 묻어난다. 그는 “아직 장가를 못 갔다”면서 나이만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전영한기자
올해로 한국생활 15년을 맞은 스티븐 캐프너는 ‘한국의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사람이다. 그는 태권도로 서울대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연세대에서 근현대소설로 국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태권도는 이론뿐 아니라 실제로 고수다. 미국 국가대표선수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라이트급)까지 올랐고, 올해 공인 7단으로의 승단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풍광으로 유명한 미국 몬태나주 출신으로 낚시와 스키를 즐기던 그가 태권도를 배우게 된 것은 리샤오룽(李小龍) 영화에 푹 빠졌기 때문.

“중국의 쿵후, 일본의 가라테, 한국의 태권도를 비교해 봤죠. 그리고 화려한 발 기술에 묘미가 있는 리샤오룽 영화에 가장 가까운 무술이야말로 태권도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는 몬태나주립대 체육학과에 진학해 계속 태권도를 익혔다. 그러나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결정되다시피 한 88올림픽 티켓을 놓친 그는 그해 본고장에서 수련을 쌓겠다는 마음으로 도복만 챙겨들고 한국을 찾았다.

“마침 세계태권도연맹에서 국제심판 교육과 영문잡지 발행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 덕분에 저는 국기원에서 근무한 최초의 외국인이 됐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 91년 서울대 체육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는 태권도에 담긴 철학연구로 9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취월장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 무렵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전임강사가 됐고 99년엔 ‘속삭임, 속삭임’ 등 최윤의 소설 6편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작가들은 이효석 김동리 이청준 안수길 등. 작가의 면면을 보고 한국적 토속미에 매료됐으리라 짐작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그는 그들 작품에 담긴 보편성에 주목한다.

“이효석의 30년대 소설 ‘벽공무한’의 주인공은 만주 하얼빈에서 러시아 무희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조선으로 데려와 함께 삽니다. 한국 평론가들은 이를 이효석의 서양숭배라고 비판하지만 저는 한국적 폐쇄성과 배타성을 극복하려는 극단의 저항으로 해석합니다.”

한국에 대한 애정만큼 그의 쓴소리는 거침이 없다. ‘금 모으기 운동’을 펼치다 1년 만에 다시 그 귀한 금이 담긴 술을 마시는 ‘냄비 근성’을 비판하고, 월드컵과 촛불시위로 이어진 집단의식을 ‘민족주의 히스테리’라고 단언한다.

“한국에서는 집단 밖에 있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집단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개인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증거일 수도 있죠.”

이렇게 때론 ‘치를 떨면서도’ 그가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집단 안에 들어갔을 때 한국인들이 베푸는 따뜻한 정에 있다.

“안 떠나는 것이 아니고 못 떠납니다. 돼지갈비에 소주 한잔 함께 걸치는 그런 인간미 넘치는 맛을 또 어디서 찾겠어요.”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