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의 여행이야기]돌아온 파라오 람세스1세

  • 입력 2003년 11월 3일 13시 57분


로마 바티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집트 미이라
로마 바티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집트 미이라
지난 주 해외토픽 뉴스에 따르면 람세스(Ramses I)1세(재위 BC 1293-1291)의 미라가 고향을 떠난 지 1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영생의 세계를 항해하기 위하여 미라로 보존된 람세스1세가, 뜻하지 않게 약탈되어 1860년 이집트를 떠나서 미국과 캐나다의 박물관 생활을 전전하면서 타의에 의해 장기간 외유를 하고 돌아오는 셈이다.

화제의 미라는 고대이집트의 신왕국 제19왕조의 시조인 람세스1세의 것이니 지금부터 약 3300년 전에 만들어 진 것이다.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역사와 신화, 소설 사이를 오가며 대중에게 소개된 탓에 정확할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몇 년 전 번역소설로 인기를 끌었던 크리스티앙자크의 소설 “람세스”에 근거를 두어 알려진 대로만 말한다면 영화 “십계“에서 율브리너가 맡은 역할이 람세스2세이니 그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고 당시 신전건축공사가 벌어진 곳은 룩소가 된다.

이제 고대 이집트의 문명의 유물인 람세스1세의 미이라는 21세기 첨단문명의 상징인 제트비행기를 타고 원하지 않았던 내세에서의 외유를 끝내고 곧 카이로로 돌아가 카이로박물관에서 그의 후손들한테 한 달간 귀국인사를 마친 후 그의 고향인 룩소에 다시 정착하게 된다고 한다.

고대이집트문명의 역사유적은 크게 무덤과 신전으로 구분된다. 이집트국토를 남북으로 가르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산 자들의 도시로 많은 신전들이 세워졌으며 나일강 서쪽은 죽은 자의 도시로 무덤이나 장례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제전 등이 세워졌다. 고대 이집트왕국의 불멸의 통치자 파라오들은 자신들의 재임 중의 중요한 사업의 하나가 스스로의 무덤을 준비하고 또 하나의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파라오를 살아 있는 신으로서 영생을 생각하였기에 죽음이란 육신의 것으로만 한정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육신을 미라로 만든 것은 내세에도 영생을 얻어 영원한 항해를 준비하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후의 세계를 그려보는 것도 그렇고 감히 평민들은 가까이 할 수도 없었고, 파라오와 사제들만 드나 들 수 있는 신전에서 이들의 역사는 미스터리를 양산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고대이집트의 파라오들의 중에서 현재의 유명세는 그들 생전의 업적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이집트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 나라의 역사이니 이집트의 역사에서 가장 공을 세운 파라오들을 존경할 법도 하지만 다른 나라사람들로서는 그 보다는 미라와 관련된 미스터리에 더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고대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비운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을 들 수 있다.

투탕카멘이 태어날 때는 아메노피스4세(Amenophis)가 다신교인 기존의 종교체제를 뒤흔드는 큰 변혁을 시도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그는 당시까지 섬겨온 여러 이집트의 신들을 다 버리고 오직 태양의 신 아텐(Aten)만 섬기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텐(Akhnaten)으로 바꿨다. 그러나 당대의 실력자였던 제사장들과의 대립에서 결국은 아크나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9살의 투탕카멘이 대를 잇게 되었다.

투탕카멘의 출생자체도 미스터리다. 투탕카멘의 선왕인 아크나텐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란 얘기도 있지만 그는 딸만 두었다는 설도 있어 아크나텐의 조카라는 설과 아크나텐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3세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다.

이런 혼란은 당시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결혼이 성행하였기 때문이 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혈연관계와 당시의 혈연관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일대 일로 대응이 되지 않기에 생긴 혼란이 아닐까 싶다. 투탕카멘도 오늘날의 족보로 치자면 자신의 이복동생뻘 되는 안케세나문(Ankhesenamun)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나이 어린 투탕카멘이 파라오에 오를 때의 이름은 유일신 아텐 신의 이름을 따서 투탕카텐(Tutankhaten)이었다. 하지만 선왕 아크나텐의 위세에 움츠려 들었던 제사장 등은 소년왕 투탕카멘이 등극하자 서서히 재기를 노리게 되어 투탕카멘은 신과 동등한 막강한 절대 권력자로서의 권력은 노련한 제사장들에 의해 누려보지도 못하고, 제사장들의 뜻에 의해 유일신으로 받들던 아텐 신을 포기하고 기존의 모든 신들을 다시 섬기도록 하여 자신의 이름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꿨지만 투탕카멘도 결국은 선왕의 대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한지 9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투탕카멘이 오늘날 고대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그가 비운의 파라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대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이 중왕국시대의 피라미드의 형태에서 신왕국에 이르면서 사막의 지하 계곡으로 바뀌었지만 파라오들의 무덤은 여전히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Carter)경에 의해 완벽한 형태로 그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권력도 제대로 한 번 누려보지 못한 파라오여서 발굴학자들의 관심도 끌지 못한 투탕카멘의 무덤은 도굴꾼들에 의해서도 그 가치를 낮게 평가를 받아왔는지는 몰라도 3500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중요한 것들은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의 특별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황금으로 된 마스크와 무려 110kg에 달하는 황금관등 250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권력을 제대로 손에 쥐어보지 못한 어린 파라오의 부장품이 이 정도라면 당대의 막강하였던 파라오들의 그것들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호화판이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투탕카멘의 발굴에 관여한 발굴팀 중에서 카터경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카나몬경이 다음 해에 모기에 물려 죽었다. 뒤이어 그의 동생 허버트 대령도, 카나몬경의 간호를 담당했던 간호원도, 카터의 비서도 연이어 20명이나 원인 모를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세계인들은 ‘파라오의 저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된 얘기는 영국의 BBC 방송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 조작된 얘기라는 주장을 하여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당시 카터경에 의해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될 당시는 세계를 뒤흔들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지구촌사람들이 큰일을 겪고 난 후 마음 한구석에서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을 때라고 한다. 그러던 차에 고대이집트의 비밀이 하나하나씩 벗겨지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은 카이로로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투탕카멘 무덤의 경비를 서던 영국병사는 끈질기게 몰려드는 기자들이 귀찮아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파라오의 잠을 깨우는 자는 죽음이 함께 하리라”는 있지도 않은 지어낸 비문의 얘기를 흘리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장난까지도 전 세계에 기사를 통해 타전되자마자 지구촌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소식에 더욱 열광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동주/김동주치과의원장 drkimdj@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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