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이 넘도록 마을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 아래쪽에 계숙이네 집이 있다. 오래 된 당산나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 계숙이의 눈물과 상처가 스며 있는 곳이다.
계숙이는 다른 과목은 자신 있는데 영어실력이 오르지 않아 안타까워하고, 컴퓨터가 없어 아쉬운, 어쩔 수 없는 요즘 아이다.
농사짓는 것이 싫어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아이들이 자라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계숙이 남매를 시골 할머니에게 맡긴다.
몇 년 후에 데리러 온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과 함께. 평생을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묵묵히 일만 해 온 할머니의 성품을 닮아 계숙이는 어린 나이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자리가 아주 크다.
엄마 같은 할머니가 농약을 치다 돌아가시자 갑자기 가장이 되어버린 계숙이는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괴로워하는 할아버지 수발에 치매에 걸린 증조할머니까지 돌보게 된다.
가장 노릇을 하면서 알게 되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어린 계숙이가 이해하기에는 버겁지만, 우리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이기도 하다.
전쟁 중에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일찍 제대하는 바람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욕설과 폭력으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드러냈던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행패가 원인이 되어 자식의 죽음까지 보아야 했던 상철이네 슬픈 가족사를 들은 계숙은 자기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또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살림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열 살 된 맏딸을 남의 집 애보기로 맡기는 대신 약간의 여비를 받고 만주로 떠난 집도 있다.
그 딸이 할머니가 되기까지 지나온 삶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더불어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운명까지 보태어진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렇듯 우리가 잊고 지내온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계숙이 할아버지 이야기도, 강성댁 할머니 이야기도 불과 100년도 안 된 우리의 역사지만 우리는 굳이 들춰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책을 덮고도 속시원한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 흘러 간 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 오늘의 모습이자, 제2, 제3의 강성댁 할머니이기도 한 교포 새어머니 이야기다.
중국에 아들과 남편을 두고도 돈을 벌기 위해 계숙이 아버지와 위장 결혼을 한 새어머니 이야기는 어린 딸을 몇 푼의 여비와 바꿀 수밖에 없었던 강성댁 할머니네와 결코 다르지 않다.
자신은 절대로 강성댁 할머니와 새어머니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고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숙이를 보면서 계숙이가 어른이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책을 덮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은 없겠지’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오혜경 주부·서울 금천구 시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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