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통신어-신조어 봇물…"대화가 안돼요"

  • 입력 2003년 11월 6일 16시 20분



젊은 두 여자가 한 남자를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저 사람 정말 ‘구리지’ 않니?”

이 말을 듣고 ‘옷에 뭐가 묻었나. 냄새가 나나?’ ‘뭔가 의혹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30대 이상일 가능성이 많다. 반면 ‘쿨(cool)하지 않다’ ‘세련되지 않다’고 여겼다면 20대 이하일 듯. ‘구리다’라는 단어 하나로 ‘언어 나이’가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직원, 교사와 학생 사이에 ‘랭귀지 디바이드(Divide)’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모두 우리말을 쓰고 있지만,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가 많아지는 것. 같은 세대끼리는 당연히 통하는 단어가 다른 세대에게는 외국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세대간 언어의 분화 현상은 현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터넷 통신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언어를 가지고 ‘노는’ 문화를 확산시켰고 ‘디바이드’를 심화시켰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요상한’ 말이 아니더라도 일상어까지도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은 2일 오후 ‘언어의 세대 차이’ 정도와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10∼50대 남녀 10명이 참가하는 ‘10인 좌담’을 가졌다.

이날 ‘10인 좌담’에는 언어학 박사 정해경씨,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어사전편찬실 김양진 연구원, 고려대 국제어학원 한국어문화교육센터 정명숙 강사가 참가해 기획 및 진행에 도움말을 주었다.


주: 10인 좌담 참가자 10인에게 물은 26개 단어중 세대간 응담이 엇갈린 5개 단어, 통용되는 의미는 사전적 정의와 최근 널리 쓰이는 구전적 의미

●‘하이루’ Vs ‘주전부리’

‘10인 좌담’은 요즘 언어 변화의 첨예한 이슈로 꼽히는 신조어와 인터넷 언어, 호칭, 뜻이 달라진 말 등을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좌담에 앞서 모든 참가자들에게 신조어와 기존 단어 26개를 제시하고 뜻을 물었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신조어는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는 ‘얼짱’이 유일했다.

‘구리다’의 경우 10, 20대는 남녀 4명 모두 ‘분위기가 허접스럽다, 촌스럽다’ ‘좋지 않다’라고 답했고 30∼50대는 남녀 6명 전원이 ‘냄새가 난다’ ‘잘못한 일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30대를 중심으로 의미가 뚜렷하게 갈렸다.

‘야자’의 뜻을 묻는 질문에서도 세대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30대 이상에게는 일정한 시간 동안 손윗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야자 타임’을 연상케 했는지 ‘막말’(50대 남), ‘반말로 얘기하는 것’(40대 여)이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반면 20대 이하는 대번에 ‘야간자율학습의 준말’이라고 답했다. 30대 남성은 두 가지 뜻을 모두 적었다.

채팅을 할 때 가볍게 쓰는 인사 ‘하이루∼’ 역시 10, 20대는 ‘안녕이라는 뜻의 채팅 용어’로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하이힐’(50대 남), ‘전혀 모르겠음. 즐거울 때 쓰는 말인가?’(50대 여)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대가 있었다.

반면 ‘아CC’과 ‘D스럽다’는 뜻을 모두 아는 20대 남성은 ‘주전부리’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다

좌담 참석자=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경애(34·홍보대행사 신시아 실장), 김하정(14·서울 봉은중학교 2년), 김재우(21·서울시립대 컴퓨터통계학과), 박용철(33·LG칼텍스정유 과장), 김영숙(53·상업·서울 명일동), 윤미라(26·대우건설 사원), 김인숙(48·주부·서울 반포동), 최영은(44·남영 L&F 인사팀장), 권광현(14·서울 봉은중학교 2년), 최성규(56·대한석탄협회 총무부장).이종승기자

● ‘3개 국어’를 해야 현대인?

“요즘엔 ‘3개 국어를 잘 해야 대접 받는다’고들 하더라고요. 10대 언어, 40대 언어, 그 윗세대 언어…. 이 모든 걸 다 알아들으면 ‘3개 국어를 한다’고 표현한다는 거래요.”

40대 남성의 말에 많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생인 딸한테서 메일을 하나 받았다.

“글 자체는 짧은데요, ‘#’도 쓰고 뭐 이상한 기호도 썼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말로 할 때는 대충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데 기호가 문자 대신 쓰이니 영…. 전체적으로 ‘좋은 얘기’라는 생각은 들던데.”(일동 웃음)

“문장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추세라서 그래요. 요즘 인터넷에 긴 글을 사정없이 늘여 쓰거나 띄어쓰기를 안 하면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오(너무 길어서 마우스 스크롤 내리느라 힘들다), ‘자방하시오(자신 스스로 반성하시오)’라고 무안을 주거든요.”(20대 남)

“어휴, 괴롭소 정말.” (30대 여자)

“근데요, 어른들 말씀 중에 못 알아듣는 것도 있어요. 특히 한자를 많이 쓰면요.”(10대 남)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오픈 국어사전’에 등록된 ‘푸라면’이 대표적인 사례다. 10대들은 ‘신라면’의 신(辛)자를 읽지 못하고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푸라면’으로 부른다. ‘오픈 국어사전’은 국어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많이 사용되는 신조어, 유행어, 사투리 등을 네티즌 스스로 등록하는 코너로 6월 오픈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말을 잘 모르더라고요. 흔히 쓰던 표현인데 10여년 사이에 거의 사라지고 있네요. ‘보릿고개’도 마찬가지고요. 가난에 관한 말이 많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전문가)

“그래도 옛날 말들은 뜻을 새겨보면 금방 알게 되지 않습니까. ‘찢어지게’라는 단어를 쓴 걸 보니 상당히 고통스러운 상황인가 보구나, 그렇게….”(40대 남)

“요즘 신조어도 단어가 생긴 배경만 알면 금세 파악할 수 있어요. ‘무뇌중’ ‘¤스럽다’는 말은 가수 문희준에서 유래된 말인데 스토리가 다 있거든요. 잠깐 인터넷을 뒤져봐도 맥락을 알 수 있는데 찾아보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죠.”(20대 남)

●인터넷 세대 내의 세대차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는 30대 이하에서도 ‘세대차’가 존재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저는 PC통신 초기 시절부터 동호회 활동도 해봤는데요, 그 때는 통신 언어라고 해 봤자 긴 단어를 줄여서 쓴다든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를 계속 패러디해서 쓰는 정도였어요.”(30대 여자)

“요즘 외계어(한글을 극도로 축약하거나 생소한 문자, 외국어와 섞어 풀어 쓴 것)를 초등학생들이 많이 쓰니까요, 외계어가 많이 섞인 글이 올라오면 ‘이 초딩 같은 놈’ 하면서 막 욕해요.”(10대 여)

“초등학생들의 인터넷 언어는 정말 색달라요. 언어를 파괴한다고 제일 욕을 많이 먹죠. 원래 신조어에서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기도 해요. 20대들이 쓰는 ‘즐팅’의 ‘즐’은 ‘즐겁게’를 줄인 것인데 초등학생들의 ‘즐!’은 ‘꺼져. 너나 즐겁게 놀라’는 냉소적인 말이 됐죠. 10대들은 또 ‘KIN'으로 쓰기도 해요. 옆으로 뉘여 보면 ‘즐’이랑 같죠?.”(20대 남)

40대 여성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 말을 쓰죠? 나는 글을 올릴 때 철자법은 물론 띄어쓰기까지 신경 쓰는데…. 얼마 전에 인터넷 사이트 구직란을 뒤져 본 적이 있었는데 ‘안냐세여∼’ ‘했구여∼’ 이런 식으로 쓴 것은 아예 제쳐놓게 되더라고요. 가정교육도 잘 못 받은 것 같아요.”

“수행 평가 점수에 들어가는 독후감에도 그렇게 쓰는 애들도 있는데요?”(10대 여)

“항상 ‘방가 방가’ 하다가 ‘반갑습니다’라고 써놓고 보면 되게 어색해요.”(20대 남)

“우리는 이모티콘도 많이 써요. ‘그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를 ‘^^’ 하나로 표현할 수 있죠.”(10대 남)

“저는 이모티콘을 쓰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감성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 쓰는 게 귀찮아서 기호의 힘을 빌리는 것 같고.”(40대 남성)

“어려서 지우개를 쓰던 세대와 컴퓨터 자판의 ‘델리트(delete)'를 쓰는 세대와의 차이죠. 인터넷은 구구절절 썼다 지웠다 곱씹을 시간 없이 신속하게 반응을 보이라고 강요하잖아요.”(30대 여성)

“…그런데 이모티콘이 뭐죠?”(50대 남성)

●사라지는 ‘여보세요’

10명의 참가자들에게 “병원에서 간호사가 ‘○○씨’라고 부를 때와 ‘○○님’이라고 부를 때 어떤 것이 더 듣기 좋은지 물었다. ‘씨’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이름 아래 써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말’, ‘님’은 ‘높임의 뜻을 나타내는 접미어’로 ‘씨’와 ‘님’은 모두 높임말이다.

“○○님이라는 존칭어가 통신 언어에서 널리 쓰여선지 ‘님’이 더 익숙하죠. ‘씨’도 나쁘진 않지만 ‘님’이 더 존중받는 느낌이예요.”(30대 여)

“만약 쌀쌀맞은 인상의 간호사가 ‘○○씨’라고 부르면 ‘싸가지 없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20대 여)

“‘씨’도 존칭인 건 사실인데 요즘 부쩍 ‘님’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네요.”(50대 여)

“부하직원에게는 ‘○○씨’가 무난하고 상사에게는 직함 뒤에 ‘님’을 붙이는 게 좋잖아요.”(50대 남)

대부분 손아랫사람에게는 ‘○○ 씨’라고 하는 것이, 손윗사람이거나 고객에게는 ‘○○ 님’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듯 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성을 지칭하는 ‘언니’라는 호칭의 남용에 대해서도 논의됐다.

“저는 여성 고객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하는데 할머니가 오든, 아가씨들이 오든 무조건 ‘언니’예요. 같은 성인 여자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친근한 호칭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50대 여성)

“예전에는 식당 직원들을 봐도 나이나 결혼 여부를 짐작해 ‘아가씨’ 아니면 ‘아줌마’라고 했었는데 이젠 대부분 ‘언니야∼’ 이렇게 통일된 것 같네요.”(50대 남)

잘 모르는 상대를 지칭하는 ‘여보세요’는 어떨까.

40, 50대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를 때 ‘여보세요’라는 말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나 현재는 쓰지 않는다고 했다. 30대 이하는 대부분 ‘저기요’라는 말로 대체한다고 했다. 20대 이하의 경우 전화상에서도 ‘여보세요’라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다고 했다.

“요즘은 대부분 발신자 번호 추적이 되잖아요. 아는 번호가 뜨면 ‘어∼’ 이러고, 모르는 번호가 뜨면 ‘누구세요?’ 이러는데요?”(20대 남)

“‘여보세요?’라고 하면 또 상대도 ‘여보세요?’라고 하고 귀찮잖아요. 처음부터 이름을 밝히거나 차라리 ‘누구세요’라고 하는 게 경제적이지 않나요?”(20대 여)

<좌담 참석자 = 권광현, 김하정(14·서울 봉은중학교 2년), 김재우(21·서울시립대 컴퓨터통계학과), 윤미라(26·대우건설 사원), 박용철(33·LG칼텍스정유 과장), 서경애(34·홍보대행사 신시아 실장), 최영은(44·남영 L&F 인사팀장), 김인숙(48·주부·서울 반포동), 최성규(56· 대한석탄협회 총무부장), 김영숙(53·상업·서울 명일동)>의 뜻을 몰랐다.

글=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언어는 늘 변해…이젠 유희의 수단으로"▼

이제 언어는 뜻을 전달하는 사회적 약속을 넘어서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시키며 갖고 노는 유희의 수단이다.

이정복 교수(대구대 국문과)는 “이전에도 언어는 우스개 노랫말 등의 형식을 빌려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었지만 인터넷 덕분으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언어를 반죽하여 재미를 스스로 만드는 창조자로 나섰다”고 진단했다.

신조어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요즘 신조어는 말이 생긴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그 뜻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 특징. 인터넷 외계어들도 타인의 해석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이 많다.

10인 좌담을 관찰한 언어학 박사 정해경씨는 “10대 참석자가 ‘범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신조어를 쓴다고 말했듯 청소년들에게 신조어, 외계어의 창작, 유포는 새로운 일탈의 경험이자 한글의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포스트모던한 행위”라고 분석했다.

그는 “인터넷 외계어에 일본어가 쓰이듯 영국에서도 통신언어에 아프리카어 아랍어를 쓴다. 네티즌들은 글자의 조합이 기발하기만 하면 낯선 언어도 무차별적으로 사용한다”면서 “이는 언어의 기표(말글)와 기의(뜻) 관계에서 기표가 완전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같은 말이라도 시대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은 언어가 늘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대 국어사전편찬실 김양진 연구원은 “본래 ‘님’은 ‘아버님’처럼 높임의 대상이 되는 관계어 뒤에 붙던 말일 뿐 ‘씨’처럼 이름 뒤에 붙는 존칭어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씨’가 남용되면서 높임의 기능이 퇴색한 반면 90년대 들어 인터넷 ID 뒤에 ‘님’이 붙기 시작, 이제는 ‘씨’의 높임기능을 ‘님’이 대신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한편 신조어의 광범위한 유포와 언어의 세대차가 심해지는 것에 대해 ‘한글을 망친다’는 우려도 많지만 전문가들은 그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바라봤다.

고려대 한국어문화센터 강사 정명숙씨는 “좌담에서 10대, 20대 참석자들이 인터넷에서 외계어를 너무 자주 쓰면 ‘초딩’이라고 부르며 수준을 낮게 본다고 했다. 은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다른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서이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형적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정복 교수도 “언어 규범의 면에서 인터넷 통신에 유통되는 많은 말들이 문제 덩어리로 간주되지만 우리말의 어휘를 크게 확충해주는 긍정적 기능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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