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비치:음탕한 계집'…야한 여자가 강하다

  • 입력 2003년 11월 7일 17시 15분


◇비치:음탕한 계집/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 손재석 옮김/605쪽 2만2000원 황금가지

비치(bitch), 암캐! 이토록 불경스러운 제목의 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표지 사진은 또 어떤가. 가슴을 드러낸 긴 머리의 여자가 가운뎃손가락을 하늘 위로 빳빳이 쳐들고 있다. 카메라의 피사체가 된 순간 도리어 카메라를 조롱하는 그녀, 발칙한 저자, 엘리자베스 워첼은 세상을 향해 지금 몸으로 ‘욕’을 하는 중이다. 30대 초반의 그녀는 ‘제3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미국 여성이다. 선배 페미니스트들이 계몽적 자세로 남성중심사회를 질타하는 여교사의 면모를 가졌다면, 그녀는 맨 뒷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저 꼰대들, 다 똑같아!”라고 비웃는 당돌한 문제아로 보인다. 개인적 성경험조차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도발적 방식으로 그녀는 이 완고한 가부장제 사회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聖女 추앙하지만 요부에 열광

저자 엘리자베스 워첼은 미국 하버드대 졸업후 '뉴욕 타임스 매거진'등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으며 한때 우울증으로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항우울제 나라(Prozac Nation)등의 책을 썼으며 이 책 '비치:음탕한 계집'에서는 표지모델로 직접 나서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광기 때문에 역사에 의해 조작되거나 거부당한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 책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여성을 주제로 한 책들 중 오랜만에 나온, 솔직하고 통찰력 있으면서 재치 있는 책'이라고 평했다.

‘비치:음탕한 계집’ 속에는 수많은 ‘요부(妖婦·Femme Fatale)’가 등장한다. 역사에 의해 ‘음탕한 암캐’로 규정된 여자들 말이다. 세간의 요부들은 그 면면도 다양하다.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파멸하도록 만든 구약성서의 데릴라, 유부남 애인의 아내를 총으로 쏘아 미국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소녀 에이미 피셔, 화려한 모델생활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마고 헤밍웨이, 막후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은 힐러리 클린턴, 남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O J 심슨의 아내 니콜 브라운. 이 여자들을 둘러싼 풍문과 진실, 비밀과 거짓말의 담론이 각 장에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

지은이의 논점은 명확하다. 정숙한 성녀(聖女)를 추앙하는 동시에 요부에 열광하는 세상, 그리고 여성의 육체가 ‘과잉 성애화(over-sexualized)’되어 재미있는 놀이거리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이 여자들은 제 욕망을 열정적으로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년’으로 낙인찍혀 단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 워첼은 그녀들이 희구했던 욕망도 남성중심사회에 의해 부추겨진 신기루였을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팝의 여왕 마돈나의 경우에서처럼 여성은 자신의 성을 이용해 해방감을 표현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조차 사실은 남성적 시선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부’라는 주홍색 낙인 뒤에 가부장제 사회의 음험한 계략이 교묘히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리클레스가 “여성으로서 최고의 영광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는 그리스의 아테네시대로부터 세상은 과연 얼마만큼 진화한 것인가.

●'헤픈 여자' 는 삶이 비참해 진다고?

특히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부분은 제2편 ‘영계 아가씨, 아빠 집에 계셔?’이다. 1992년 애인의 아내에게 방아쇠를 당겼던 16세 소녀 에이미 피셔.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외면하고픈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에이미는 지금도 1급 살인죄로 복역 중이지만 그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이용했던 성인 남성들은 오히려 그녀와의 경험담을 언론에 팔아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헤픈 여자’는 언제나 비참한 종말을 맞지만, 상대 남성들은 결정적 순간에 쓱 몸을 빼고는 당당하게 또는 뻔뻔하게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워첼의 바짝 쳐든 가운뎃손가락! 우리 사회도 그 통렬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저자는 명쾌하게 대안을 제시한다.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부끄러움 없는 솔직함이다.’ 이 지독한 책, ‘비치:음탕한 계집’의 뒷맛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 이유다.

정이현 소설가·‘낭만적 사랑과 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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