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는 “군 문제를 8년 가까이 다뤄오며 여기저기서 취재한 내용들을 퍼즐 맞추듯 완성해 정리했다”고 소개했다.
이 기자에 따르면 국가정보원 사상 최악의 실수는 1998년 ‘최인수 사건’이다. 최인수는 중국 선양(瀋陽)에서 활동하던 북한 공작원.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7월 국정원은 최인수를 중국에서 납치해 국정원 안가(安家)에서 심문하다가 놓쳤다. 안가를 탈출한 최인수는 서울의 한 신문사를 찾아가 인터뷰까지 했지만 국정원의 보도통제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국정원이 최인수를 납치해간 데 대한 보복으로 대한항공 선양지점장으로 위장해있던 국정원 공작원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결국 국정원은 중국에 침투시킨 ‘블랙’(상대국에 비밀리에 파견한 비공식 정보요원)들을 전원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이 사건을 무마했다. 중국에 애써 구축해놓은 공작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국정원이 최인수를 납치해온 이유는 ‘북풍’ 관련 첩보를 뽑아내기 위해서였죠. 북풍과 관련된 진술이 나오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절대 불리해지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공작들은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적 출세를 위해 기획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기자는 책에서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이후 한국이 평양 폭격을 검토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응징 보복전이 될 뻔한 이 작전은 △북한의 조밀한 방공망 때문에 한국 공군기의 희생이 불가피하고 △제2의 한국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큰 데다 △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취소됐다는 것이다. 대신 이후 정보기관은 북한 요인 귀순공작에 주력했다. 이때부터 한국 정부의 공작전은 박정희 정권시절의 ‘테러전’에서 ‘외교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
이 기자는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 해 4월부터 공작전을 사실상 멈췄다”며 “통일을 이루려면 대화를 하는 한편 장기적인 공작전도 함께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