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허문명/'망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 입력 2003년 11월 12일 18시 50분


‘국립중앙박물관 위작 망신’ 기사(본보 A30면)가 보도된 12일 오전, 국립중앙박물관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전시담당자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국회 답변 준비하랴, 정오표(正誤表)가 수록된 도록들을 다시 점검하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전시하려던 작품이 가짜로 밝혀진 개관 이래 초유의 사건을 놓고 박물관 관계자들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반응이다.

한 미술사학자는 “다산(茶山), 율곡(栗谷)의 유묵(遺墨) 2점이 위작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서적류 40여건의 제작연도가 도록에 모두 틀리게 인쇄된 것은 실수 정도가 아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일이다”라며 “단순한 인력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 전반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고 개탄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박물관측의 해명은 이렇다. 다산의 유묵은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져 왔고, 율곡의 유묵은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1980년대에 기증받은 작품이라는 것. 유물구입 예산이 본격적으로 책정된 1990년 이후 구입한 유물의 경우 해당 분야 전공 학자들과 박물관의 학예사, 문화재위원회 등 세 차례 감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치기 때문에 위작 시비가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90년 이전 유물 중에서도 도자나 회화 분야는 박물관 내의 전문가들이 위작을 걸러내고 있지만 문제는 책이나 글씨 등 서적류라는 것. 이 분야의 내부 전문가가 한 명도 없어 위작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해명이다. 그러면서 박물관측은 2005년에 옮겨 갈 용산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역사관을 설치하면서 서지전문가의 충원 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일이 단지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위작으로 드러난 유물을 감정했던 한 학자는 “내부 전문가가 없다면 외부 전문가에게라도 한번 보여주고 전시하는 것이 상식인데 감정절차 한번 없이 전시를 강행한 안이한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른 학자는 “문제는 5000여건의 서적류와 9000여점에 이르는 서예작품들이 한번도 검증받지 못한 채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이전을 계기로 세계 6대 박물관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전시장 크기나 소장유물 수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맨 파워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사건을 그야말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허문명 문화부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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