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37>주인잃은 신발, 떠난 이를 그리며…

  • 입력 2003년 11월 13일 18시 31분


“내가 신고 다니는/신발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 1호이다/나의 은밀한 기쁨과 부끄러움을 모두 알아버린 신발을/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다 보면/반가운 한숨 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르는 기침 소리가 들린다/신발을 신는 것은 삶을 신는 것이겠지/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건너간 내 친구는/얼마나 신발을 신고 싶을까/살아서 다시 신는 나의 신발은 오늘도 희망을 재촉한다.”

얼마 전 신발장을 정리하다 떠오른 생각이다. 오래 잊고 있던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신발주머니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님, 그간 어찌 나를 잊고 계셨어요’ 하는 것만 같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신발을 신을 적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새롭다. 특히 신발을 잃어버려 안타까워하는 꿈을 꾼 다음 날은 더욱 그러하다. 같은 층 수녀들의 방 앞에 놓인 신발의 종류만 보고도 ‘오늘은 집에 있군’ ‘오늘은 외출을 했군’ 하고 가늠해 보곤 한다.

여러 해 전 늘 식당 옆자리에 앉던 젊은 수녀가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날 나는 그의 방에 들어가 주인 잃은 신발을 들고 섧게 울었다. ‘까만 구두엔 이승을 걸어 나간 발의 그림자’라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가톨릭교회에서 11월은 ‘위령성월’이라 하여 죽은 이를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고 우리 자신의 죽음도 미리 묵상해 보는 시간을 자주 갖도록 권유한다. 나는 오늘도 낙엽이 흩어진 수녀원 묘지에 올라가 성수를 뿌리며 기도했다.

바람 속에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오늘은 평화로운 레퀴엠처럼 들렸다. ‘수녀님 발은 초등학생처럼 작네’라고 놀리던 동료의 목소리도 들리고 ‘나 죽거든 내 신발 가져’라며 웃던 선배 수녀님도 문득 그립다.

이제 다시는 신발을 신을 수 없는 그이들이 땅속에 누워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날마다 새롭게 감사하며 사세요” “더 기쁘게 걸어가세요”라고.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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