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사원(寺院)매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면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매춘 봉납제(奉納制)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매춘은 순례자들의 여독을 풀어 준다는 명목으로 신성한 신전 내에서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창기(娼妓)가 등장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조까지는 철저한 밀매음 형태였다.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집창촌(集娼村)인 유곽을 설치했다. 1916년에는 ‘유곽업 창기 취체규칙’을 만들어 매춘을 공식화하고 창기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公娼)제도다.
공창제도는 1947년 미 군정청에 의해 폐지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군 주둔지에 본격적인 사창가가 들어서 양공주들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매춘은 엄연히 불법이었으나 권력은 기꺼이 매춘과의 동거를 택했다. 권력 스스로의 찌꺼기를 배설하기 위해서도 ‘하수구’는 필요했다. 1961년 여론에 떠밀려 ‘윤락행위방지법’을 만들었으나 내용은 빈약했고 어찌된 영문인지 시행령은 8년 뒤에 제정됐다.
사창가는 여론이 끓을 때마다 철퇴를 맞았다.
1968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국내 최대의 윤락가였던 ‘종삼(鍾三)’ 소탕에 나섰다. 일명 ‘나비작전.’ 열흘간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종삼은 초토화됐다. ‘종삼의 추억’은 지금 50, 60대에겐 잊혀지지 않는 젊은 날의 초상이다.
매춘의 역사는 자본의 역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에 이르러 성(性)은 완전히 평정된다.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시장의 수중에 떨어진 성은 자유를 만끽했으나 성의 상품화는 성을 물신화(物神化)하고 말았다. 성적 흥분의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화폐로 전이되는 도착이 일어나게 된 것. 자본에 예속된 성. 그것은 더 이상 본능의 해방이 아니었고 ‘체제의 부역(負役)’일 뿐이었다.
매춘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성을 거세(去勢)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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