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지원, '대숲에 서면'

  • 입력 2003년 11월 16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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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이

꿈을 찢기고 지우는 길이었다면

서슴없이 겨울 대숲으로 오라

시퍼런 댓잎 사이로

불어오는 짱짱한 칼바람이

공공하게 언 몸뚱이를 후려치거든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라

연하고 부드럽게 올라오는 희망으로

제 속의 더러운 욕망을 모두 비워야

단단한 정신으로 울울창창 하늘을 찌르리니

굽고 뒤틀린 삶이 맨 처음

푸르게 꿈꾸며 찾던 길이 아니었다면

그대, 폭설이 세상을 뒤덮는 날

주저 말고 대숲으로 오라

- 시집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문학동네) 중에서

옛말에 뽕나무가 ‘뽕’ 하고 방귀를 뀌니, 대나무가 ‘대끼놈’하고 참나무가 ‘참아라’ 하더란다. 뽕나무의 분방함, 대나무의 결기, 참나무의 인욕(忍辱)이 실제로 그러한가?

이름자에 빗댄 말놀이에 불과하지만 사물들은 저마다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이 자연의 은유인즉 대숲에 서면 그 꼿꼿하고 푸른 기상이 압도한다.

누군들 ‘맨 처음 푸르게 꿈꾸며 찾던 길’ 하나쯤 없을 것이며, 자꾸만 ‘굽고 뒤틀리는’ 삶의 시련과 옹이가 없을 것인가?

세파에 지쳐 첫 마음의 기억조차 희미해질 때 짱짱한 칼바람 후려치는 대숲의 호통이 서늘하다. 폭설에 길을 잃을수록 ‘단단한 정신으로 울울창창’ 하늘을 찌르라 한다.

대나무가 곧기만 한 건 아니다. 대나무가 곧은 것은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새의 무릎 관절 같은 마디, 당신을 쓰러뜨린 고통이 당신을 일으켜 줄 마디가 되리라.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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