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강남 어제와 오늘/강남은 없다?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6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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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작가 이호철은 동아일보에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연재했다. 당시 강북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63년 한강 남쪽의 경기 광주군 일대가 서울에 편입됐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서울은 한강의 북쪽, 즉 강북을 의미했다.

당시 서울시의 최대 과제는 강북 인구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70년 강남개발계획이 발표됐지만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유도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30여년. 정부의 최우선 정책과제는 ‘강남 부동산값 억제’로 바뀌었다. 강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투기꾼으로 낙인 찍히는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그곳에도 평범하고 소박한 꿈은 있었다. 비 오면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던’ 그곳에, 무슨 떼돈을 벌겠다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집 한 칸 마련해 맘 편히 살아보자고, 아니면 알콩달콩 신혼살림 시작해보자고, 그나마 쉽게 둥지를 틀 수 있던 곳이 강남이었다.

강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전, 그리고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그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강남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1982년 회사 통근이 편한 곳을 찾아 강남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정동성씨가 강남의 '새 중심'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 섰다. 정씨는 두 자녀를 결혼 시킨 뒤에 강남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이종승 기자.

● 프롤로그-강남 오다

72년 서울시는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어 아주 싼 값에 공무원들에게 분양했지만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아파트는 외롭고 불편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강북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봄 서른두 살이 된 가장 이소길씨(63)는 부인과 아이 셋을 데리고 전남 순천에서 논현동 셋집으로 왔다.

그는 전라도에서 시골장을 돌며 이불을 팔아 돈을 좀 모았지만 다른 사업에 손을 대 모두 말아 먹고 거의 빈털터리였다.

“내가 못 배웠으니까 자식들이라도 잘 키워보려 올라왔지요. 돈이 없어서 강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씨에게는 강남이 두 번째 인생의 원점이었다. 아이들을 사촌 처제에게 맡기고 아내와 경북 풍기로 내려가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2년을 고생해 방배동 삼호아파트가 들어설 때 단지 내 한 평짜리 상점을 전세 65만원에 얻었다.

강남은 지금은 강북에 있는 집을 팔아 이사 가기도 힘들지만 당시는 이씨처럼 지방에서 맨손으로 올라온 사람들에게는 ‘서울드림’의 출발지였다. 77년 서울대 석사논문 ‘강남으로의 주거이동에 관한 연구’는 74∼75년에 강남으로 이주한 가구 중 22%가 지방에서 올라왔고 서울 강북에서 온 가구는 45%였다고 분석했다.

● 그리고 그들은 아파트로 갔다

이씨는 그렇게 10년 동안 악착같이 모아 삼호아파트 31평형짜리를 2500만원에 샀다. 이씨에게 아파트는 자신의 설움을 씻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아이가 많아서 세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숱한 거절을 당했죠. 한이 맺히더군요. 꼭 아파트 한 채를 사고 말겠다고 결심했죠.”

상가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변은 아파트 터만 잡혀있는 빈 벌판이었다. 그땐 이웃 상인들과 건물 밖 평상에 앉아 이렇게 한탄하던 이씨였다. “돈 몇 십만원만 있으면 여기 땅을 살 수 있을 텐데….”

76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일대 250여만평이 아파트지구로 확정되면서 80년대 초반까지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속속 들어섰다.

아파트를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편리하고 쾌적한 거주 공간을 원하는 주부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김창란씨(54·주부) 가족이 강남구 역삼동 진달래아파트 31평형짜리로 온 것은, 근처에 아직 빈 터가 훨씬 더 많은 80년이었다. 분양가에 프리미엄 500만원을 붙여 2780만원을 주었다.

전에 살았던 동대문구 장안 시영아파트는 커가는 아이 셋을 데리고 살기에는 비좁고 불편했다. 찬물 설거지가 당연하던 그 시절, 그녀는 더운 물까지 나오는 새 집에 감격했다.

정동성씨(46·우리은행 자금팀 수석부부장)는 결혼을 한 1982년 종로구 혜화동에서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 주공3단지 아파트로 이사했다. 950만원에 16평짜리 전세였다.

“출퇴근이 편했죠. 아파트 앞에 통근버스가 다녀서 15분이면 회사에 갔으니까. 그러나 누구보다도 아내가 가장 좋아했죠.”

아파트는 단독주택보다 관리가 쉽고 비용도 적게 들었고 장을 보기도 편했다. 나이 든 시어머니들은 “그래도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해”라며 ‘철없는’ 며느리를 보고 혀를 끌끌 찼지만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아파트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겸재 정선이 1741년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그린 압구정 풍경. 이곳에는 1975년부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림 속 정자는 지금의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쪽에 해당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 자녀에게 승부를 걸다

이소길씨는 자녀 5남매가 교육을 받을 만큼은 받았다고 했다.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좋은 학교 갈 수 있었지. 물론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과외라도 시켰을 텐데, 우리는 그런 형편은 안 됐으니까.”

72∼74년에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강남 개발을 지휘한 손정목씨(75)는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 30대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분가해 지금 강남의 터를 닦았다는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했다. 층층시하 어른을 모시는 단독주택에서 탈출해 아파트에서 단촐하게 핵가족을 꾸릴 수 있었기 때문일까.

김창란씨가 처음 이사왔을 때, 이웃들도 대부분 강남에 온지 얼마 안 되는 30대 젊은 엄마들이었다. 이들은 자녀 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주변에 학원이 없으니까 마음 맞는 엄마들끼리 미술, 음악, 스케이트 강사를 초빙해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강남 과외 열풍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의 자녀들은 강남 8학군의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도 교육 열기는 대단했다. 김씨는 강북 학교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95년 일본 지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동성씨는 살 집을 찾다가 처형의 한마디에 마음을 굳혔다. “아이들 교육시키려면 무조건 대치동으로 와.”

정씨는 처음에는 자신과 아내가 편하자고 강남으로 왔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 환경이 좋아졌다고 했다.

“학교에서 잘 가르치는 것을 떠나서 공부할 분위기가 됐더라고요. 수업 시간에 떠드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요. 왜 사람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강남으로 오려는지 그 때 알았지요.”

● 욕망에 눈뜨다

91년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시집을 냈다.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강남의 쾌락과 향락을 은유하는 내용들이었다. ‘오렌지족’과 ‘야타족’이라는 말이 신문에 오르내렸고 고급 유흥문화가 자리 잡았다.

김정욱씨(47·신시아 대표이사)는 92년 20여년 간 살던 성북구 삼선동에서 서초구 잠원동 동아아파트로 이사했다. 김씨는 강남 생활 초기에 이질감을 느꼈다.

“강북은 도심에서 술 먹고 집에 가려면 택시로도 30∼40분 걸리잖아요. 그런데 강남이라는 데는 술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집이에요. 어떻게 된 동네가 집 바로 옆에 술집이냐 그랬죠.” 그래서 처음 2∼3년은 강북 단골집들을 계속 다녔다.

88년 서울올림픽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부(富)는 더욱 더 강남으로 몰렸다. 벤처 붐이 일고 젊은 갑부들이 대거 탄생하면서 테헤란로 일대는 고급유흥가가 들어섰다. 압구정동과 청담동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강남의 ‘고급’ 이미지가 굳어졌다.

부동산 투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투기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이소길씨가 17년 전에 2500만원에 산 43평형 아파트는 지금 시가 5억원이다. 그래도 이씨는 “구반포에 비하면 얼마 안돼요. 은마아파트는 9억이라고 하던데. 우리 아파트가 재건축이 안되니까…”라고 못내 섭섭해 했다.

정동성씨도 “집 늘려가면서 돈 벌지 못한 게 참 바보 같다. 은행 대출 받고 전세 끼고 산 다음에 값 오른 뒤 팔기 몇 번 했으면 노후대책은 됐을 텐데”하면서 웃었다. 그가 95년에 1억6500만원에 산 은마아파트 34평형은 지금 7억원을 호가한다.


● 강남, 닫힌 구조로 변하다

30년 전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 손짓하던 강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는 것은 자유롭지만 들어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

정동성씨의 한 친구는 90년대 중반 반포동 아파트 34평형에서 집을 늘린다며 노원구 월계동 43평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반포동 집은 그동안 3억원이 올랐지만 월계동은 3000만원이 올랐다. 그 친구가 강남으로 다시 올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정씨는 고3, 고2 두 자녀만 결혼시키면 강남을 떠나겠다고 했다.

“애들이 분가하면 외곽으로 나가려 해요. 하지만 떼돈을 벌기 전에는 다시 강남으로 돌아오지 못하겠죠.”

김정욱씨가 97년 5억원을 주고 입주한 아파트는 6년 만에 두 배로 뛰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강남 밖에서 강남으로 들어오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하도 봐요. 생돈 10억원이 어디 있다고 강남에 아파트를 얻겠어요. 로또라도 당첨되면 모를까.”

닫힌 구조는 10, 20대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정씨는 당초 둘째가 대학만 들어가면 일산이나 분당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대 때문에 자녀 결혼이후로 계획을 연기한 것. 아이들의 친구가 모두 여기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씨는 “큰딸 친구 하나가 일산으로 이사 간 뒤에도 전철을 1시간 반이나 타고 강남에 와서 놀다 간다”고 말했다.

김창란씨도 아이들 사이에서 강남,북의 이질감이 더하다고 걱정이었다.

“아이들은 강북에서는 약속도 하지 않아요. 강북 아이들은 옷차림도 다르다나요. 부잣집 친구들을 사귀면 자기 부모의 능력도 그렇다고 생각하나 봐요. 사실은 ‘강남 서민’에 불과한데….”

● 에필로그-강남은 없다?

이제 강남에는 이소길씨가 돈 없음을 한탄하며 지켜보던 허허벌판은 없다. 김창란씨의 자녀들이 겨울에 스케이트를 지치던 물웅덩이도 사라졌다. 그의 집 베란다에서 보이던 대모산 구룡산은 타워팰리스에 가려버렸다. 정동성씨가 주말에 마음 가볍게 타던 동호대교로 이어지는 램프는 이미 정체와 지체를 반복하고 있다.

이소길씨는 방배동에 뼈를 묻겠다고 했지만 다른 이들은 강남 탈출을 꿈꾸고 있다. 순수하고 소박한 꿈을 가지고 찾았던 강남은 이제 그 강남이 아니다.

김정욱씨가 잘라 말한 것처럼 “강남에는 추억이 없을”지도 모른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강남개발 어떻게:정부의 ‘10·29대책’ 이후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내림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부동산 ‘광풍’으로 사람들은 강남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짧지만 격렬하게 요동치는 역사를 가져온 강남. 이를 기획하고 설계한 사람들에게서 강남개발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1972∼74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씨(75)와 75∼80년 도시계획과장과 국장을 지낸 김병린씨(67)가 그들이다.

개발초기 강남은 영동(永東)이라는 지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러나 서울에는 행정구역상 영동은 없다. 그런데도 영동대교, 영동시장, 영동사거리는 있다. 영동이란 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두 가지 설이 있다. 손씨는 “영동은 영등포(永登浦)의 동쪽이라는 설과 영등포와 성동(城東)구의 중간이라는 설이 있다”고 말한다.

63년 당시 경기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시흥군 신동면이 서울로 편입됐다. 그 위치가 영등포구와 성동구 사이였다. 이 지역은 각각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가 된다. 66년 서울시가 이 지역 개발을 추진하면서 ‘영동지구’라고 이름 붙였다. 강남 개발의 시작이었다.

76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구 250만평을 아파트지구로 확정했다. 이는 김병린씨(67)의 작품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주위에 아파트를 지으라는 당시 구자춘 시장의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김씨가 아파트지구를 착안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홍수 피해 방지였다. 당시 반포동, 잠원동 일대는 한강보다 낮은 저지대여서 홍수가 나면 자주 침수됐던 것.

김씨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홍수가 나도 최소한 3층 이상으로 올라가면 물이 빠질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점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오늘의 강남을 예측했을까.

김씨는 강남의 교통난을 들면서 “강남 지역 도로 폭을 당시로는 매우 넓은 50m로 잡았다. 그해 서울시 자동차 대수가 10만대도 안 될 때였다. 솔직히 20년 안에 100만대가 넘을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손씨는 “70년대에는 서울 인구가 매일 900명씩 늘어나던 때다. 그들 살 땅을 마련하고 상수도 시설 놓는 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떻게 20, 30년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도시계획을 잘 모르던 구 시장이 우연히 ‘아파트를 지으라고 한 것’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고 말했다.

우연히 맞아떨어져 오늘을 이루었다는 강남의 영화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지금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우연’은 수십 년 후의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모두들 궁금해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기 힘들다.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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