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바이러스(HIV)는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킨다. 따라서 일단 발병하면 현재 치료제로는 기껏 1, 2년 생명을 연장할 수밖에 없다. 치료제 개발도 요원하다….
올해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들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에이즈는 현재 ‘완전정복’을 앞두고 있으며 단지 사람들의 무지 미신 편견이 치료를 방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 그런지는 HIV의 작동 원리와 치료제의 특성을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HIV의 작동 원리=HIV는 면역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을 하는 CD-4 세포에 침입해 자신이 증식하는 공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울러 CD-4 세포를 격감시켜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HIV는 CD-4 세포의 세포벽에 있는 문고리를 따고 자신의 RNA를 세포 안에 침투시킨다. RNA는 DNA로 변신하는 ‘역전사(逆轉寫)’ 과정을 거쳐 세포핵 속으로 자리를 옮겨 사람의 DNA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단백질을 만들어 핵 밖으로 내보내며 바깥에서는 단백질 분해효소가 긴 단백질을 자르고 묶어 HIV 꼴로 만들어 세포 밖으로 내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HIV의 ‘새끼들’은 CD-4 세포 밖으로 나가 다른 CD-4 세포를 사냥한다.▶그래픽 참조
▽HIV를 융단 폭격하라=이런 메커니즘이 확연히 밝혀짐에 따라 의학자들은 HIV의 RNA가 DNA로 바뀌도록 돕는 효소와 단백질 분해효소의 기능을 각각 억제하는 약들을 개발했다. 현재 역전사 효소 억제제 10가지와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 6가지가 나와 있다. 이 중 3, 4가지 약을 한꺼번에 먹는 ‘칵테일 요법’이 놀랄 만한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13개 연구진이 1만27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적절한 시기에 칵테일 요법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3년 안에 말기상태에 이르거나 숨질 확률이 3.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 절반이 숨졌다. 병이 생기자마자 칵테일 요법을 받으면 체중, 기력, 면역기능이 한꺼번에 회복된다.
▽복용하기 편하게=많은 사람들이 HIV가 끊임없이 변이해 약이 안 듣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약을 꾸준히 복용하지 않아 내성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대체로 에이즈 환자들은 너무 많은 약을 복용해야 하는 고통 때문에 복용을 중단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는 감염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약과 함께 한꺼번에 20알씩의 약을 먹어야 하는 고충이 따른다.
국내에서 두 가지 역전사 효소 억제제를 합친 약이 나왔지만 정부에서 건강보험 인정을 해주지 않아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하루에 두 알만 복용하도록 한 ‘트리지비어’까지 나와 있지만 한국 환자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또 칵테일을 장기 복용하면 지방 대사에 장애가 생겨 혈중 지방농도가 올라가는데 이를 해결하는 약 ‘아타자나비르’도 선보였다.
▽속속 등장하는 신약=‘칵테일’에 추가할 수 있는 신 개념의 약들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HIV가 CD-4의 문고리를 따고 들어갈 때 ‘특수열쇠’로 문을 따고 세포막끼리 몸을 합치는 ‘융화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 과정을 막아내는 약을 선보였다. 올해 초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 허가를 받은 ‘푸지온’이 바로 그 약인데 임상시험에서 어떤 치료법도 듣지 않는 환자에게 괄목할 만한 치료 효과를 보였다. 이 약이 기존의 칵테일에 추가되면 치료 효과를 배가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의 칵테일 요법으로는 HIV의 RNA가 DNA로 바뀌어 사람의 DNA 사이로 살짝 끼어들어간 상태에서 증식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를 알아내 박멸할 방법이 없다.
최근 미국에서는 HIV의 DNA가 사람의 DNA 사이로 끼어들어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약도 개발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치료 백신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치료 백신은 바이러스 전체가 아닌 DNA 또는 RNA의 일부를 인체에 주입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체가 CD-4 세포 밖에 떠도는 HIV를 알아채고 죽이려고 시도한 ‘1세대 백신’은 대규모 임상시험 결과 실패로 드러났다. 현재 포항공대 성영철 박사팀 등 수많은 연구팀이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2세대 백신’을 두고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에이즈 감염은 더 이상 사형선고가 아니다. 현재도 의료진의 지시만 잘 따르면 큰 탈 없이 생활할 수 있고 이런 신약들이 등장하면 ‘에이즈 정복’은 현실로 다가올 듯하다.(도움말=서울대병원 감염내과 오명돈 교수,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오원섭 교수)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국내감염인의 명암▼
올해 에이즈 환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뉴스는 국내 감염 1호인 정모씨(41·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씨는 1985년 국내 첫 감염인으로 알려진 인물.
그러나 그는 에이즈는 허구의 병이고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서 치료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일부 방송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해 치료를 잘 받던 환자들이 약 복용을 중단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소외된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TV에 떳떳이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는 정씨가 ‘언니’였고 ‘누나’였다.
그는 2002년 설사 때문에 탈진 상태로 입원한 데 이어 올해 5월에도 결핵과 설사 증세가 겹쳐 입원했지만 대증(對症) 치료만 받고 퇴원했다. 올 7월 중순 결핵균이 온몸으로 퍼져 정식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는 11월 초 ‘에이즈가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에이즈 감염인으로 밝혀진 2호 환자인 김모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김씨는 정씨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지만 병원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는 점에서 정씨와 달랐다. 자영업을 하는 그는 활기차게 일하면서 사업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환자의 극명한 대비는 에이즈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며 에이즈 감염자나 환자의 가장 큰 적은 무지(無知)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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