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龍의 여인…쑹메이링, 장제스와 결혼

  • 입력 2003년 11월 30일 18시 28분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했고 또 하나는 권력을 사랑했으며 다른 하나는 중국을 사랑했다.”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헤쳐 온 ‘쑹가(宋家) 3자매.’ 상하이 출신의 재벌로 쑨원(孫文)의 혁명자금을 댔던 쑹루야오(宋如耀)의 셋째딸 쑹메이링(宋美齡)은 권력을 사랑했다. 1927년 그녀는 국민당 실세인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식날 서태후(西太后) 왕관의 진주알로 장식한 구두를 신었다. 권력을 향한 그녀의 야심은 ‘용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쑨원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의 처제였던 쑹메이링에게 첫눈에 반한 장제스. 그러나 둘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나이가 열한살이 위였고 이미 결혼을 세 번이나 한 처지였다.

둘째언니 쑹칭링(宋慶齡)의 반대는 격렬했다. 그녀 자신도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세 연상인 쑨원과 결혼했지만 장제스를 지독히 싫어했다. 쑨원마저 결혼을 만류하자 장제스는 “끝내 반대하면 혁명에 투신하지 않겠다”고 쑨원을 압박했다.

13세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명문 웰즐리대를 졸업한 쑹메이링. 그녀는 “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용모뿐”이라고 말했다. 장제스의 외교고문으로 활약한 그녀는 서방세계에서 인기가 높았다.

1943년 그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외국 여성으로는 처음 미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미국의 진정한 적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그녀의 웅변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시사주간 타임은 그녀를 두 번이나 표지인물로 올렸고 “기지 있고 아름답고 풍도(風度)를 갖춘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쑹메이링이 올 10월 미국에서 사망하자 생전에 그녀를 비난했던 중국 정부도 그녀가 “항일 구국의 영웅이었다”고 기렸다.

그녀는 소생이 없었다. 일기도 편지도 남기지 않았다. 유산도 거의 없었다. 직접 그린 그림 100점이 유일했다. 타임의 표지 제목처럼 그녀는 ‘용의 여인’이었으나, 떠난 자리엔 ‘허물’조차 없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