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인섭, '우물 치는 날'

  • 입력 2003년 12월 10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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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그 이튿날

우물을 치려고

어른들은 머리를 감아 빗고 흰옷을 갈아입었다

신발도 빨아 신었다

손 없다는 날

마을은 개도 안 짖고

하늘이 어디로 다 가서 텅 비었다

늬들 누렁코도 부스럼도 쌍다래끼도 우물 땜시 다 벗었니라던

할매 말씀이 참말이라고

우리들은 턱을 누르며 믿었다

울타리도 절구통도 살구나무도 언제 본 듯한 날

우물가엔 아래서 올라온 것들이 쌓였다

삼대 부러진 것 바가지 실꾸리 신발짝 호미자루 쇳대

뼈다귀 돌쩌귀 이끼 못 흐레 쇠스랑날 연필 눈썹 꿈동 텡

-시집 '꿈을 꾼 뒤에'(문학동네)중에서

마을 아낙들 물동이 이고 동동, 남정네들 물지게 지고 출렁, 신발 적시던 시절이 있었단다. 더러 물방개나 미꾸리, 운 좋으면 계란 노른자 같은 달덩이도 건져가던 샘물이 있었단다. 온 동네 사람들 날마다 퍼가도 밤마다 넘치는 우물이 있었단다.

장맛비에 쌀뜨물처럼 뿌연 물 흙내 풍기면 우물을 펐단다. 발 동동 구르던 신발 짝, 머리핀, 몽당연필만 나오랴? 쌍굴 오르내리던 누렁코 기차, 기계총 땜통머리, 쌍다래끼 눈썹까지 다 건져 올리면 온 마을 아이들 얼굴이 말개지고말고.

이젠 먼 옛날 아니면 먼 시골 얘기란다. 녹슨 파이프 너머 먹둠벙에 무엇이 빠졌는지 소독내 풍기며 콸콸, 물지게 물동이 다 벗고 참 편리한 세상이란다, 아가야.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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